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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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함께 자라는 밀과 가라지
성경구절 창세기 28:10-19a/ 로마서 8:18-25/ 마태복음서 13:24-3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7-19
전주 사랑의 주님께 찬양드리나이다(D. Buxtehude)
찬양1부 생명의 양식(Cesar Franck) 특송: 김홍태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내 영혼의 은총 입어(J. M. Black)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하나이다(L. Mason)
후주2부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하나이다(L. Mason)
성경본문 창세기 28:10-19a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8:18-25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마태복음서 13:24-30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1. 지난 주일 말씀에 이어, 오늘도 마태복음서의 씨 뿌리는 비유가 교회력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오늘의 비유도 하늘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은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세 장소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에서는 악한 자 혹은 사탄, 악마로 표현됨), 밀 가운데 가라지(독보리)를 뿌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가라지는 수염이 있는 밀과 식물학적으로 아주 가깝고 처음에는 비슷하게 보이는데, 번식력은 훨씬 강해서, 가라지가 많으면 그 뿌리들이 곡식의 뿌리와 엉키게 되어 곡식의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가라지를 사전에 뿌리까지 뽑아, 튼실한 곡식을 더 많이 수확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입니다.

 

이 비유에 앞선 비유, 곧 길가와 돌짝밭과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13,18-23)와는 달리, 여기서는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독보리를 뿌리는 원수가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우연히 가라지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의도적으로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살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혹은 기대하지 않은, 또는 자기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나쁜 일들이 일어나, 충격을 받고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는 몰랐지만 자업자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연히 벌어진 일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참으로 나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행동하는 데서 일어나기도 하지요. ()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악은 언제나 악한 사람으로부터 나오고, 악한 사람을 통하여 작용합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죄와 죄인, 악과 악한 사람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좋은 씨를 뿌린 주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들이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자, 주인은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고 합니다(13,24-30).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이상한 반응입니다. 주인은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가라지와 밀이 너무 비슷해서,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하여 밀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13,29). 후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해석할 때 드러나지만, 이 비유는 가라지와 밀이 비슷한 것처럼, 의인들과 악한 자들,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거짓 신앙인들도 함께 섞여 있고, 비슷하게 보여서 구별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이나, 밀을 가라지로 잘못보고 밀을 뽑아버리는 실수의 가능성에 대한 염려에서 온 표현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대자들에게 위협받고, 고통을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세상에 대한 현실적인 서술이라고 보입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한 사람도 있고, 인간의 삶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는 모호한 현실을 다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마치 좋은 씨를 뿌려도, 같은 밭에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앞선 씨 뿌리는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십니다(13,36-43): 좋은 씨를 뿌리는 주인은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밭은 세상, 좋은 씨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라지를 뿌리는 원수는 악마요, 가라지는 악한자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추수 때는 심판의 날이고, 추수꾼은 천사들로서, 세상 끝 날에 가라지, 곧 불법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아다가 불 아궁이에 쳐 넣고 불에 태워 버릴 것인데,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도 대조갈라냄이 두드러집니다. ‘좋은 씨가라지’, ‘하늘나라의 자녀들악한 자의 자녀들’, ‘가라지를 뿌린 악마추수하는 천사’, ‘추수 때세상 끝 날’,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의인들불 아궁이에서 울며 이를 갈 불법을 행한 사람들과 그들이 죄짓게 한 모든 일들대조갈라냄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갈라냄은 추수 때, 다시 말해 심판 때에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제자들의 인내를 지시합니다. 추수 때가 오듯이, 심판의 날도 반드시 오고, 그 날이 오면, 의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 악인들은 불 아궁이에서 불타고 울면서 이를 갈 것이라는 것이지요(13,42-43). 억울한 사람, 어디에 호소해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울화병(鬱火病)에 걸린 사람들에게 심판은 위로와 희망의 마지막 보루(堡壘)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서에서 점증적으로 강화되는 예수님의 수사학적 독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23,13 ), ‘독사의 자식들(23,33) 규정하고,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또 회개하지 않는 마을 가버나움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고(11,23), 가버나움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8,11-12), 불 아궁이 속에 던져지고,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표현이 다섯 번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13,42; 13,50; 22,13; 24,51; 25,30 ).

 

이 모든 표현들은 임박한 심판과 처벌에 대한 경고이자,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위로였습니다. 1세기의 유대인은 유대전쟁에서 로마 제국에게 완전히 패한 후, 나라와 성전이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과 희생 제사를 중심으로 했던 유대교가 랍비들과 토라 연구를 중심으로 한 종교로 대체된 것입니다. 마태는 이런 역사적 전환기에 그의 복음서를 썼는데, 유대교 가족 내부적 충돌, 즉 크리스천 유대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유대인 율법학자들 사이의 충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집단의 논쟁은 치열했고, 바리새파 적대자들이 마태에 대해 가졌던 태도는 마태가 그들에게 가졌던 것만큼이나 가혹했고 폭력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적대적 집단이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만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고(5,22),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18,9),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25,41) 심판자의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도(16,19-31) 지옥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16,24),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9,48-49)는 표상도 초대교회에 익숙한 지옥도(地獄圖)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지옥 불구덩이에서의 고통으로 표상되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종교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관심은 지옥의 역사를 추적하거나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지옥이 심판의 장소로 표상되면서 왜 하필이면 불과 관계되어 표현되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입니다. 불은 고통을 주기 때문에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불은 모든 불결한, ()하지 않은 것들을 깨끗이 해주고, 스스로 오염되지도 않기에, 정화와 구원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옥이 어찌 죽음 후에만 있는 심판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자연의 보복과 심판, 살아서 지옥보다 뜨거운 지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2. 작년(2019) 9월에 발생하여 6개월간 지속된 호주 산불이 한반도를 넘는 면적을 태우고, 10억 여 마리의 야생동물이 죽음을 당한 후, 과학자들은 기후위기와 함께 모든 지옥이 열리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20201월 미국 핵과학자회는 핵 위협과 기후변화 등으로 인류가 최후를 맞게 될 시간, 이른바 지구종말시계가 자정 100초 전으로 다가왔다고 경고하면서, 2050년에 90억 명에 이를 인류는 섭씨 4도 이상 상승할 때, 5억 명 정도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뜨거워지는 지구를 우리가 최근 가까이에서 경험한 것은, 갈수록 대형화되고, 장기화되고, 연중화되는 세계적인 산불과 폭염입니다. 올 해 들어 6월까지 브라질 아마존 열대우림에서는 1395번의 산불이, 몽골과 인접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는 같은 기간에 246번의 산불이 났습니다. 올 해 상반기 러시아 시베리아와 북극권에 발생한 폭염현상은 지구온난화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구온난화가 기후 변화를 초래한다는 주장이 그저 가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인 셈이지요. 우리나라의 평균 폭염일수(하루 최고 기온이 33도 이상)1980년부터 2000년대는 8-11일이었는데, 2018년에는 31.5일로 늘어났습니다. 폭염 때문에 에어컨을 더 틀게 되고, 2030년까지 전 세계 에어컨은 7억 대 더 늘어날 것이고, 육류소비는 2050년까지 95% 증가할 것이기에 지구는 더 뜨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후악당국가로 꼽힌 나라입니다. 2018년 기준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7, 2017년 기준 온실가스 배출량으로는 OECD 국가 중 4, 10년간 증가율로는 세계 2위를 기록하여 몇 년째 기후악당국가에 속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1인당 석탄 사용률 1, 해외 석탄 투자 3, 석탄수입량 4위 국가이기도 합니다. 현재 61기의 석탄화력발전기가 운전 중인데 7기를 더 건설 중입니다. 이것들이 모두 완공되는 2022년이면 기후폭탄은 더욱 막강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2019년 현재 인구 2.2명 당 한 대꼴로 자동차를 소유한 자동차중독사회입니다. 전국에 등록된 자동차가 2,300만대, 수도권에만 1,000만대로서 미세먼지 주요 배출원(22.56%)입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과소비 국가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OECD국가평균대비 40%나 더 많고, 한국의 1인당 전기사용량은 일본, 프랑스, 독일보다 높습니다.

 

기후위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는 알고 있고, 또 뜨거워지는 지구를 매일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표면토 유실과 사막화, 경작지 감소, 지하수 고갈 등으로 식량위기가 고조될 전망이고, 해수면은 섭씨 2도 상승할 경우, 지금보다 25미터 상승하며, 섭씨 2.5도 상승하면 50미터까지 상승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후위기는 인류가 겨우 300년 전부터 추구해온 화석연료에 기반한 발전, 무한 성장, 무한 경쟁 체제의 신자유주의적이고 약탈적인 자본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가 알아도 행하지 않는 데, 알면서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8,22),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8,19)고 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신음하는 피조세계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음하는 피조세계와 그들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 사이를 잇는 매개자입니다. 오직 하늘, 오직 땅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영원과 순간이 잇닿아 있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성소(聖所)라는 것이지요.

 

3. 야곱이 돌 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을 꾼 곳도 그런 장소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을 축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것 때문에, 원한이 깊어져,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은(27,41)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간 야곱은 하란으로 가는 길목 어느 곳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됩니다.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층계 위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며.....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28,13-15)고 약속하십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고 말하면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베델’,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꿈에서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하신 약속을 다시 확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다음과 같이 서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28,20-22).

 

서원은 스스로 선택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결속시켜 주고 감사에의 의무를 지니게 합니다. 그러한 맹세는 인간의 마음이 약하고 변덕스러움을 알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결심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곳을 성소,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기억의 장소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상황은 그의 삶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피해 한 달 정도 걸리는 낯선 여행길에 올라 외삼촌 라반의 집까지 혼자 가야하는 길 위에, 아무도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고, 그의 미래도 불확실했습니다.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하셨던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십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층계에서 천사들이 오가는 곳(28,12), 하나님의 약속이 다시 확인되는 곳(28,13-14),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 때문에(28,15), 절망이 소망으로 변하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28,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가 아니고서는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땅, 하나님의 피조물이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이 지구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집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구를 지키지 못하면, 하늘로 들어가는 문도 닫힐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세상이지만,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밀과 가라지를 갈라내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선을 행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크리스천이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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