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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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18:9-15/ 로마서 5:1-8/ 마태복음서 9:35-10:8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6-14 |
전주 | 주께 간구하나이다(J. S. Bach) |
찬양1부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Harry Bollback) 특송: 김홍태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사(JOHN C. WARREN) 특송: 이예랑 교우, 김유정 집사, 김호 집사,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모든 시험 무거운 짐 주께 맡기나이다(E. F. Hoffman) |
후주2부 | 모든 시험 무거운 짐 주께 맡기나이다(E. F. Hoffman) |
성경본문 |
창세기 18:9-15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로마서 5:1-8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9:35-10:8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첫째로 베드로라고 부르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도마와 세리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를 넘겨준 가룟 사람 유다이다. 예수께서 이들 열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1.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선배 목사님 소개로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은 아픈 사람들을 쑥으로 치유하는 분이셨습니다. 뜸도 아니고, 쑥으로 대롱을 만들어 림프(lymph)샘 가까이에 대는 이른바 ‘쑥온 치료’를 하셨습니다. ‘불통즉통(不通卽痛), 통즉불통(通卽不痛)’이 선교사님의 지론이었습니다. 통하지 않으면 아프고, 통하면 안 아프다는 것이지요. 림프샘이 쑥으로 활성화되면 면역력이 높아지고, 그러면 몸이 따뜻해지고,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의학적 상식이 별로 없는 저도 몸은 마음과 서로 통하고, 인간은 자연과, 자연은 우주와, 우주는 하나님과 서로 통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관계성과 상보성이 생명의 이치라는 생각은 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선교사님의 ‘쑥온 치료’는 놀라운 효과가 있어,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믿지 않으실 터이고, 진보적이고 학문적 신학을 했다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아마 이상하게 혹은 불쾌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작은 집에서 주일 오후에 ‘쑥온 치료’를 했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장소가 좁아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저희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처형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의 한 여대생과 그 어머니를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외출도 화장도 안하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서 몸이 너무 야위어 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얼마 전 교회에서 있었던 친구 혼인식에서 실신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그 학생에게 묻는 것입니다. 가끔 나쁜 생각이 떠오르냐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런 나쁜 생각들은 사탄이 주는 것이니,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읽으면서 사탄을 쫓아내면 좋아질 것이라고 하면서 치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쑥온 치료’가 끝나자 한결 얼굴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얼굴 한번 보고 오라고 하자 화장실로 가더니 조금 있다 환한 얼굴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거울을 본 것이 참으로 오랜 만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혹시 이 학생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마땅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후 그녀는 더 이상 오지 않아 볼 수 없었고, 이런 치료가 그녀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날, 저는 선교사님이 한 말, ‘나쁜 생각은 사탄이 주는 것이니,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으면서 사탄을 쫓아내면 좋아질 것이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받은 상처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마음의 문을 굳게 닫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원인을 사탄으로 인격화하는 것이 과연 그녀의 치유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분명한 원인을 찾아야 치료도 효과적이지 막연하게 사탄의 짓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가 자신이 받은 상처의 원인을 객관화하여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힘이 없을 때는 원인을 사탄에게 돌려 외부화하는 것이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 가운데 흉악망측하고, 뿔 달린 머리와 꼬리를 흔들면서 창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내는 모습의 사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에 칼을 물고 하얀 소복을 입고 등장하는 귀신이 지금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병이 사탄이나 귀신에 의해서 생긴다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문명시대, 첨단의학이 발전한 시대에 정신병을 포함한 어떤 병이든지 그 원인을 사탄에게 돌리는 것은 무지의 극치입니다. 가끔 기도원에서 병 낫는 안찰기도 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목숨을 해치는 일이 보도되는 것을 보면, 한심한 생각까지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오늘 날에도 기도원을 찾거나, 굿과 같은 종교적인 제의에 의지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치유의 이적은 옛 날에도 있었고, 60년대 한국신흥종교들의 성장에도 기여했습니다. 박태선의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 일명 ‘전도관’이 대표적이지요. 박태선이 손 씻은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에 집회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박태선은 씻은 물을 뿌리기도 했지요. 한국전쟁 후의 사회적 혼란과 빈곤이 이단종파의 발흥과 신앙치유에 대한 믿음을 확대하는데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치유를 귀신축출과 연결시켰던 시대, 귀신을 쫓아내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던 시대,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살던 시대가 그리 오래 전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하듯이,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선포의 중심이듯이, 치유와 귀신축출은 예수님의 활동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축출의 이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만이 이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축출하시면서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 카리스마적이면서 동시에 마술적인 능력을 가진 기적 행위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전쟁사의 저자인 요세푸스는 자기와 같은 고향 사람인 엘르아살이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엘르아살은 특정 식물의 뿌리들을 담은 봉지를 아래에 매단 둥근 고리를 악령 들린 사람의 코에 대고, 냄새를 맡게 하여 악령을 그의 콧구멍을 통해 끌어내고 그가 갑자기 쓰러질 때 솔로몬의 이름을 부르고, 솔로몬의 주문을 암송하면서, 악령으로 하여금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습니다. 그는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물이 가득찬 대야를 약간 거리를 두어 놓게 한 뒤, 그 사람에게서 나온 악령에게 그것을 뒤집어 엎으라고 명령함으로써 악령이 그 사람에게서 떠났음을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또 티야나의 아폴로니우스는 죽은 처녀를 살려냈고, 랍비 하니나 벤 도사는 아무 것도 없는데서 빵을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적, 귀신축출(Exorcism)과 치유의 역사성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은 분명히 다른 이적 치유자나 귀신 축출자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술적 의식이나 권위 있는 주문으로 귀신을 쫓아내거나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인격을 바탕으로 치유를 펼친 귀신 축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귀신축출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으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라고 믿은 것은 예수님에게서만 보이는 특징입니다.
그러나 귀신축출은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누가복음에는 18년 동안 병마 때문에 허리가 굽은 여인의 치유(눅 13,10-17)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지만, 예수님이 축출하신 귀신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도 파괴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마가복음이 전승하는 귀신축출 사건이 그 예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에서 ‘군대’(레기온)라고 불리는 귀신을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떼에게로 쫓아낸 사건이 그것이지요(막 5,1-20).
귀신축출은 예수님과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서 고쳐주시자, 적대자들은 예수께서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난합니다(마 12,22-24). 귀신을 내쫓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악마와 한 패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막 3,22-27). 적대자들과의 이런 논쟁은 예수님의 귀신축출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고,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이해에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줍니다. 예수님은 귀신축출을 통해서 악의 세력이 마침내 물러갈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의 문턱에 서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이미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눅 10,18). 힘센 사람은 벌써 포박을 당했고(마 12,29), 하나님 나라도 이미 왔습니다(마 12,28).
모든 병이 귀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예수님의 모든 치유가 귀신축출로 수행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귀신축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치료에도 믿음의 모티브가 작용합니다(막 9,14).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신 후 예수님은 언제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기적 기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대의 기적 이야기는 이미 일어난 기적의 사실성에 대한 추후의 믿음만이 다루어집니다. 예수님만이 믿음을 기적에 선행하는 신비한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기적을 기대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는 당사자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적이나 치유능력이 치유자 자신 안에 있다고 주장하고, 이적을 자신의 신격화에 사용했던 마술적 치유자들과 예수님은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치유는 예수님의 자비와 치유받기 원하는 사람의 믿음이 만날 때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지요.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환자들을 치유해주셨을까요? 마태복음 저자는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 ‘길 잃은 양 떼’와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마 9,36). 버려진 사람들, 갈 곳이 없는 사람들, 학대당하고 착취당해 자기 몸 하나도 지탱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불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스플랑크니 조마이’는 ‘스플랑크나’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내장’, ‘애타는 마음’,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단지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위가 틀어지게 아프거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통증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의붓어머니에 의해 7시간 동안 가로 44cm, 세로 60cm 여행용 가방에 갇혔다가 목숨을 잃은 천안의 9살 소년, 창녕에서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끈을 테라스 난간에 묶어두고 폭행과 학대를 한 계부로부터 도망쳐 극적으로 구조된 11살 소녀, 지난 25일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경찰관에게(데릭 쇼빈) 무릎으로 목이 졸려 죽어가던 흑인 조지 플로이드(46세)의 모습을 볼 때, 우리 모두가 온 몸으로 느꼈을 통증, 위가 뒤틀리는 고통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네이팜탄에 맞아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절규하던 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당시 하버드 대학 신학 교수였던 샘 킨(Sam Keen)은 ‘내장의 신학’을 말했지요. 베트남 전쟁의 참혹성에 전율하는 자신의 몸과 베트남 민중의 고난의 일체성, 주사를 맞는 아기를 보고 몸을 움추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자아와 타아 사이의 내장의 연결을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구호와 자선의 길을 가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장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연대와 치유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셨던 같은 일을 제자들을 부르셔서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마 10,1).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내고 치유할 권능은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권능은 선물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기에, 마태의 표현을 빌리면 ‘거저 받은 것’(마 10,8)입니다. 그러므로 선물로서의 권능은 영원히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 은사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시험에 빠진 것이 그 예증입니다. 은사는 선물처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마 10,8). 대가를 바라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물로 권능을 주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앓는 사람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마 10,7-8).
그렇다면 이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마땅히 오늘 우리 시대에 가까이 온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앓는 사람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한다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묻고, 찾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제자의 길입니다.
3. 귀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다이모니온’(마 7,22; 막 1,34; 요 8,48)은 사람을 사로잡아 완전히 부릴 수 있는 초인간적인 힘을 지닌 영적인 세력입니다. 귀신은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생명을 고통으로 파괴하고, 모든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귀신은 초인적 힘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능력으로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이들을 ‘더럽다’고 한 것은 이들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이 연합하여 이 유령을 잡기 위한 성스러운 몰이 사냥에 나섰다.’ 1848년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출판한 ‘공산당 선언’의 머리글입니다. 공산주의는 그 후 더 이상 유령이 아니라, 체제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배회하던 유령이, 국가체제로 구체화되자, 그 유령은 더욱 강력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파괴한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때 유럽을 떠돌던 ‘유령’이 ‘인격화된 악의 세력’ 혹은 ‘체제화된 악의 세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 시대의 ‘더러운 귀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 질병의 원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체제가 된 악한 세력입니다. 그것은 제국, 전쟁, 약탈적 자본주의, 배금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라는 다른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의 더러운 귀신을 어떻게 내쫓아낼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실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로마서 5,8).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는 더러운 귀신을 축출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시대의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히지 않고, 또 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환난을 당할 것임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는 것, 그리고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5,5).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없고, 이런 믿음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희망할 수 없습니다.
4. 어느 날 한창 더운 대낮에 장막 어귀에 앉아있던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나그네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한 해 후에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은 사라는 웃습니다. ‘나는 기력이 다 쇠잔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린 것이지요(창 18,12). 사라가 웃은 것은 임신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늙은 남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창 15,5)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너무 오래 지연되어, 기다리다 지쳤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던 세 나그네의 실없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사라를 본적도 없고, 그녀의 말을 들은 적도 없지만, 그녀의 속생각을 알고 꾸짖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가진 신적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들은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창 18,14)고 말하면서 사라를 꾸짖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과시하거나, 통찰력이나 이적을 신성의 증거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비록 지연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을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마 9,37). 고난의 때가 하나님의 추수 때라는 것이지요. 추수할 때, 곧 역사가 전환기를 맞이할 때는 사람들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있을 때와 같은 때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여 위대한 행위를 하려고 하십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온 인류가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지금이 하나님의 추수 때입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회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야 할 때입니다(마 10,7-8).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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