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하나님은 쉬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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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2:1-4a/ 고린도후서 13:11-13/ 마태복음서 28:16-20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6-07 |
전주 | 주 성령께 기도하나이다(D. Buxtehude) |
찬양1부 | 참 좋으신 주님(김기영 곡) 특송: 송승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성령이여, 임하소서(Thomas Attwood) 특송: 이예랑 교우, 김유정 집사, 김호 집사,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내 영혼이 은총 입어(J. M. Black) |
후주2부 | 내 영혼이 은총 입어(J. M. Black) |
성경본문 |
창세기 2:1-4a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였다. 고린도후서 13:11-13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마태복음서 28:16-2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1.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에누마 엘리쉬’같은 바벨론의 창조설화, 이집트의 ‘멤피스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대근동의 창조설화와 성경의 창조 이야기의 차이도 명백합니다. 바벨론 창조설화에 의하면, 창조는 신들의 짝짓기와 투쟁, 폭력과 살인에 의해 이루어졌고, 인간의 창조는 신들이 쉴 수 있기 위한 노동력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함으로써,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단순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는 바벨론 창조설화의 폭력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야훼는 폭력과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와 조화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창조를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 2,1)고 함으로써, 신의 휴식이라는 같은 모티브가 성경과 고대근동문헌의 창조 이야기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러나 바벨론 창조설화에 따르면, 신이 쉬기 위해 인간에게 무거운 노동의 짐을 지우지만, 성경은 노동을 신의 휴식을 위하여 인간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은 ‘노동’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두 단어의 뜻에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보다’(aboda)인데 이 단어는 ‘봉사’에서 유래했고, 다른 하나는 ‘멜라카’(melaka)로서 ‘보내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창세기는 노동을 신적 위임의 성취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노동을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그리스 세계의 노동이해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서 이해되는 노동은 강요된 필연적인 자연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의 표현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파트너로서 인간이 참여하는 것인데, 이 참여가 개인에게가 아니라 공동체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엿샛날까지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신 것을(창 2,1) ‘안식일’ 축제와 연결시켰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출애굽기에 있는 십계명(출 20,8-11)과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신 5,12-15), 두 곳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명령은 출애굽의 전승과 관련하여 안식일의 계명을 지킬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신 5,15).
그러나 출애굽기 20장 11절은 안식일 자체를 창조기사를 가지고 근거시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출 20,8-11).
유대교의 모든 축제는 파종과 추수, 여름과 겨울의 환절과 같은 자연적인 주기를 받아들이고, 이들을 하나님의 구원사적 사건들에 대한 회상과 결합시킨 특징이 있습니다. 초막절, 맥추절, 유월절 등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안식일,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안식년과 희년은 출애굽이라는 구원사적 연관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창조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모든 축제들에 비하여 가장 거룩한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이 파라오 체제의 쉼 없는 강제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외적 자유의 상징이라면, 안식일은 내적 자유의 상징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억압과 폭력의 현실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현재 안에서 안식일의 평화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 없이는, 모든 일을 멈추는 일 없이는, 하나님의 현재 속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평안 없이는, 억압과 계급과 착취로부터의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출애굽도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과 안식일과 창조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6일 동안의 노동의 날들 다음에 오는 휴식의 하루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일하기 위해 쉬는 날이겠지요. 그런데 노동에 지친 현대인만이 아니라, 교회도 창조를 대부분의 경우, ‘6일 간의 사역’으로 이해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일곱 째 날을 통한 창조의 완성’은 소홀이 여긴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입니다. 모든 창조의 사역이 안식일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기 위해 쉬신 것이 아니라, 쉬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축제’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의미와 목적은 일곱 째날, 곧 안식일에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완성은 하나님의 쉼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의 ‘창조로부터’ 쉬시고, 그의 창조를 ‘보시면서’ 쉬시고, 그의 창조 ‘안에서’ 쉬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안식일은 하나님의 현재적 현존입니다. 창조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나타난다면,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납니다. 창조에서 하나님은 자기 밖으로 나가시지만, 안식일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십니다.
2. 우리는 앞서 안식일 규정이 출애굽 사건에 대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국고(國庫)도시를 짓기 위해 노예와 같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쉰다는 것은 단지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출 5,6-19). 그것은 구체적으로 파라오의 채찍질과 억압과 강제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파라오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였던 이집트의 잡신(雜神)들, 우상들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이런 잡신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빼앗아 가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끝없는 생산을 요구하고 만족을 모르는 무한생산 시스템에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이집트 파라오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고 월터 브루그만은 정당하게 말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만족을 모르는 시장의 끝없는 강요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안식일은 곧 안식년과 희년으로까지 확대됩니다. 모세는 신명기 15장 1절부터 18절에서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안식일을 가장 철저하게 확장한 내용을 선언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매 7년 마다 가난한 사람들이 진 빚을 면제하고(신 15,1),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이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주며, 도와주라고 명령합니다(신 15,8).
안식년은 빚의 탕감이라는 경제적 자유만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도 의미합니다. 안식년이 오면, 종들도 자유를 주어 내보내야 했고, 빈 손으로 내보내서도 안 되었습니다(신 15,12-13). 안식년은 인간에게만 쉼과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땅도 쉬어야 했습니다(레 25,2). 물론 휴경의 전통은 고대 근동에서 잘 알려져 있었고 실천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휴경 후에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하다는 농경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큰 수확과 소득의 가능성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기에 안식년을 지켰던 것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멈춤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강요와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성에 비추어 사회의 모든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입니다.... 안식일은 단지 기운을 되찾는 멈춤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변화를 일으키는 멈춤입니다.’
3.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주일’은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유대인들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 지키는 안식일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할례와 함께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기에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막 2,27-28)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안식일 계명을 깨뜨리거나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으로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완성될 꿈, 출애굽 해방과 구원의 축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셈에 따라 그리스도교적인 축제의 날(안식일)을 ‘주간의 첫날’(행 20,7), 또는 ‘매주 첫날’(고전 16,2), ‘안식일 첫날 새벽’(막 16,2),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요 20,1)으로 이해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새로운 헬라적 표현인 ‘주님의 날’(계 1,10)이 등장했습니다. ‘제8요일’이라는 특이한 표현은 2세기에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일요일의 축제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억과 연관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던 최초의 교회당은 팔각정으로 건축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을 보이지 않는 ‘제8요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의 안식일로부터 그리스도교 축제가 분리, 혹은 대체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후 312년 3월 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재판관, 도시의 시민들과 모든 생업의 활동은 존경해야 할 태양의 날에 자유로이 휴식해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로써 ‘주의 날’은 태양의 날과 결합되어, 국가적 휴일로 제정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안식일의 휴식뿐만 아니라, ‘새 창조’의 시작을 앞당겨 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새 창조’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들과 사람들 자신의 한 주간의 노동을 뒤돌아본다면, 그리스도교의 부활의 축제는 앞을 향하여 새 창조의 미래를 내다봅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휴식에 참여하게 한다면, 주일은 세계의 새 창조의 능력에 참여하게 합니다. 안식일이 기억과 감사의 날이라면, 주일은 희망과 시작의 날입니다.
4. 저는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의 대부분의 신앙생활이 그랬던 것처럼, 기도와 성경읽기,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와 금식은 엄격하게 지켜졌습니다. 주일에는 일체의 소비활동을 할 수 없었고, 종일 교회 안에서 예배와 기도, 봉사만 해야 했습니다. 예배 외의 모든 활동이 죄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빵집에 가는 것도 죄, 극장가도 죄, 쇼핑도 죄, 놀러 다니는 것도 죄였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신학적 성찰 없이 단지 문자적으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근본주의적 생각이 비복음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안식일, 혹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의 신학적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주전 589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부터 할례와 안식일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성전이라는 공간 종교로부터 안식일이라는 시간 종교로 전환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일뿐만 아니라, 안식일 정신의 실천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의 시장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필요와 욕구 생성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필요와 욕구는 우리를 끝없이 쉬지 못하게 하고, 만족을 모르게 합니다. 간혹 쉬기도 하지만, 쉬는 것조차도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에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도 일에만 둡니다. 그러니 더 많은 소득을 가져오는 일이 더 좋은 일이고, 경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일 없는 사람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잉여인간으로 취급받습니다. 스스로도 가치 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인간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발전과 성장을 지향하는 일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론 공동체적으로도 쉬어야 한다는 것이 답입니다. 우리는 지난 6개월 동안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와 ‘잠시 멈춤’을 강요당했는데, 그 사이에 어떻게 파괴된 생태계가 복원되었는지를 보면, 답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쉼이 곧 숨, 생명의 회복임을 반증해 준 것이지요.
‘코비드-19’ 사태의 원인이, ‘오로지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무절제한 탐욕의 정신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바람에 야생생물들의 서식지를 포함한 생태계를 대대적으로 파괴한데’ 있고, ‘거기에 자본, 물자, 사람의 대량이동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논리까지 합세하여 전개된 파국적 상황’이라고 지적한 김종철 교수도, ‘코비드-19’ 사태로 ‘세계 곳곳에서 소비와 산업 활동이 일시적이나마 정지 내지는 둔화되자 대기가 청명해지고, 소음이 잦아들고, 자연 만물이 생기를 되찾은 것은 종래의 생활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확연한 증표’라고 합니다.
그런데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이 계속되면, 경제 양극화와 인종주의, 배제와 차별은 더 심화될 것입니다. 자연은 조금 더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난 25일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경찰관에게(데릭 쇼빈) 무릎으로 목이 졸려 살해당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46세)가 절규했던 것처럼, 인종주의 때문에, 배제와 차별과 폭력 때문에, 인간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세상이 더 빠르게 올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쉬신 것처럼 사람과 자연도 쉬어야 합니다. 쉼과 숨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숨 쉬지 않으면 죽듯이,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이 쉬신 하루 만이라도 온 세상에서 폭력과 총성이 멈추고, 산과 강을 파헤치는 불도저와 기계들이 쉬고, 살인적으로 질주하는 트럭과 주말마다 고속도로를 메우는 자동차들도 쉬어야 합니다. 쉰다는 것은 일체의 경제적 활동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비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정지 기간이요, 몸과 영혼의 무위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기간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목적이자 그 참된 미래인 하나님의 쉼을 향하여 열린 날입니다. 안식일은 시간 속에 있는 영원한 현재이고, 주일은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장차 올 새로운 창조를 미리 맛보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 죽임의 세상 속에서 생명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은 안식일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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