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우리는 어디에 뿌려진 씨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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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25:19-26/ 로마서 8:1-6/ 마태복음서 13:1-9, 18-23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7-12 |
전주 | 신실하신 주여 우리를 붙드소서(D. Buxtehude) |
찬양1부 |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Swedish Folk Melody) 특송: 안채연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샬롬(김도현 곡) 특송: 김경원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믿음 더욱 주소서(W. J. Kirkpatrick) |
후주2부 | 믿음 더욱 주소서(W. J. Kirkpatrick) |
성경본문 |
창세기 25:19-26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마흔 살 때에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리브가는 밧단아람의 아람 사람인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사람인 라반의 누이이다.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배었는데,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님께로 나아갔다.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 리브가가 이 쌍둥이를 낳았을 때에, 이삭의 나이는 예순 살이었다. 로마서 8:1-6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마태복음서 13:1-9, 18-23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오셔서, 바닷가에 앉으셨다. 많은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물가에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여러 가지 일을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너희는 이제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를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가에 뿌린 씨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또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 |
1.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41개의 비유들이 있습니다. 기록된 그리스어 텍스트의 배후에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의 여운이 남아있고, 예수님 시대 이전의 랍비 문헌에는 단 하나의 비유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유는 예수님이 하신 진정성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 정론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비유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랍비 문헌의 가장 초기 문헌집인 미슈나(Mishnah)는 기원후 200년경에 제작된 것인데, 여기에 비유는 단 한 개만 들어 있습니다. 비유가 랍비 문헌에 일반화된 것은 기원후 5세기경이었다는 사실도, 비유가 예수님의 말씀의 역사성과 진정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것을 입증해줍니다.
비유는 ‘은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은유(隱喩)로 번역된 ‘메타퍼’(metaphor)는 두 개의 그리스어 어원, 즉 ‘건너서’ 혹은 ‘가로질러’라는 뜻의 ‘메타’(meta)와 ‘나르다’ 혹은 ‘지니다’라는 뜻의 ‘페레인’(pherein)에서 온 말입니다. 즉 은유는 한 사물로부터 다른 것으로 ‘건너서 나르는 것’, 그래서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보는 것’ 혹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유(比喩), ‘parable’의 그리스어 어원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파라’(para), ‘더불어’ 혹은 ‘-와 함께’라는 말과 ‘발레인’(ballein), ‘놓다’ 혹은 ‘던지다’라는 말이 결합된 비유는 항상 외부적으로 그 이야기 너머의 보다 폭넓고 다른 어떤 지시 대상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 이른바 ‘뿌려진 씨의 비유’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전승되고, 예수께서 손수 그 뜻을 풀이한 비유로서, 마가는 이 비유가 다른 모든 비유들의 모델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비유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비유는 단순하고 명백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의 파종법을 모르는 사람은 농부의 이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농부는 게으르거나, 성실하지 않은 농부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파종 후에 밭을 갈기 때문에, 사실 아무데나 씨를 뿌려도 상관없습니다. 농부는 갈지 않은 밭 위에 파종합니다. 길 위에 씨를 뿌리는 것도, 가시덤불 위에 뿌리는 것도 모두 의도적입니다. 후에 그 길도, 가시덤불도 함께 갈아엎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짝밭에 떨어졌다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흙으로 얇게 덮여 있는 석회암은 보습에 부딪혀 소리가 나기 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가에 떨어진 씨들은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들은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들은 기운이 막혀 자라지 못한 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은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농부가 아니어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은 비유를 전승하는 누가는 토양에 빗대어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 돌짝밭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눅 8,11-15).
너무 이해하기 쉬워서, 별도의 뜻풀이를 하지 않아도 될 내용이지요. 초대교회는 이 비유를 개종자들에게 박해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설 것과 세상에 물들지 말 것을 경고하는 윤리적 권고로 이해했는데, 지금까지도 이 비유는 대부분 ‘옥토로 비유되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시험을 이기면서, 순종의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을 위한 권면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신자라고는 하지만 신앙이 교양수준이어서, 마음이 늘 흔들리고 의심이 많아 믿지 못하는 이른바 ‘나이롱 신자’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어렵고 힘든 시련을 받으면 떨어져 나가는 ‘약한 신자’들도 있고, 세상 근심과 걱정, 재물과 향락에 사로잡혀 구원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신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씀을 듣고, 마음에 굳게 간직하면서, 시련과 시험을 견디고 이겨내어, 놀랄만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신자도 있지요. 어쩌면 우리도, 이들 네 유형 가운데, 한 사람, 아니 그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씨는 모든 곳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잘못해서, 혹은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짝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팔레스타인 농부의 파종법을 이해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도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렘 29,12-14). 사도행전 저자도 말했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행 17,27). 땅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어디에도 다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깨닫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도, 잠시 동안 믿다가 떨어져 나가는 것도, 세상 근심과 향락에 사로잡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백배의 결실을 거두는 것도, 결국은 전적으로 사람 자신의 몫입니다.
둘째, 마가와 마태는 세 종류의 실패, 혹은 실패한 세 부류의 사람들과 세 가지 다른 정도의 성공(마가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순으로, 마태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순으로)을 말하는데, 누가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실패와 오직 한 가지 모습의 성공(백 배의 결실, 눅 8,8)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겨자씨 비유처럼, 보이지 않는 씨앗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많은 결실이 보이게 드러난다는 데 초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게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경이(驚異), 엄청난 배율의 결실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셋째,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의미에 초점이 있지, 말씀을 받아드리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나 도덕성, 생활률적인 권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뿌려진 씨앗 비유에서, 한쪽에는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이라는 나쁜 상태의 땅 위에 뿌려진 씨앗들을, 다른 한쪽에는 백 배의 결실을 맺은 곡식의 물결을, 한쪽에는 죽음을, 다른 한쪽에는 풍성한 생명을, 한쪽에는 보이지 않는 씨앗들을, 다른 한쪽에서는 엄청난 결실을 대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청중은 겨자씨 비유(마 13,31-32)와 누룩의 비유(마 13,33)와 마찬가지로, 뿌려진 씨의 비유도 일종의 ‘대조비유’로 이해했습니다. 쓸모없는 땅, 길가나 돌짝밭, 가시덤불이 가득 찬, 희망 없는 휴경지가 모든 기대와 이해를 훨씬 넘어설 만큼 풍작으로 물결치는 밭으로 변한다는 것이지요. 추수는 하나님 나라의 출현에 비교됩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삼중법적 표현은 고대 근동에 잘 알려진 표현법인데, 모든 척도를 넘어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충만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많은 노력이 헛되고, 실패로 보일지라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오고, 그와 함께 모든 인간적 기대와 이해를 넘어서는 풍작도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와 반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절망적인 시작에서부터 그가 약속한 영광스러운 결과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이 뿌려진 씨에 대한 비유의 진정한 뜻이고,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신 하늘나라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밭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길가에 있는지, 돌짝밭에 있는지, 가시덤불 아래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느 밭이든지 그 가운데 하나, 둘, 아니면 그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거기에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 세상과 대조되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고,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는 나라이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이 웃게 될 나라이고,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상을 받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눅 6,20-23).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 덧붙여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막 4,9; 마 13,9)고 말씀하셨는데, 누가는 예수께서 외치셨다고 합니다(눅 8,8). 굳이 외치신 까닭을 누가는 설명하지 않지만, 어쩌면 모두 자기가 서 있는 땅만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바라보라고 하시기 위해 그러신 것이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2. 겨자씨 같이 작은 씨앗이 큰 나무로 변하고, 누룩이 모든 밀가루를 부풀리고, 시작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으나, 마지막은 큰 결실을 거두는 이런 놀라운 ‘대조적 역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에서와 야곱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사십 세에 맞이한 아내 리브가에게서 60세에 얻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이미 태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배속에서부터 싸우는 쌍둥이 때문에 괴로워했던 리브가는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갔다고 합니다(창 25,22). 그러자 야훼 하나님은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 25,23)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장자가 아니라 차남인 야곱이 야훼의 구원사의 주역이 되리라는 것이지요.
당황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자 상속권이 분명한 고대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장자이며 사냥꾼으로서 건장한 체격에 선한 마음을 가진 에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모순덩어리이고 교활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잔머리를 굴리는 비열한 차남인 야곱을 하나님의 축복 약속의 계승자로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이 참으로 비열하고 교활하며 이기적이고 매우 현실적이며 모순으로 가득 찬 야곱의 인격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품이나 인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누가 하나님을 찾느냐는 데 있습니다. 누가 과연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그가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데서 찾지만(창 25,34), 우리는 에서가 꼭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장자직이라는 것이 도대체 판다고 팔아지는 것인가? 또 판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팔려지는 것인가? 장자직이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질서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장자로서의 기득권은 생득적으로 결정된 운명이었고, 에서는 그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으며, 굳이 지켜야 할 것으로, 또는 쟁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운명으로 보장된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주어진 기득권 안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사람, 세상이 나를 바꾸는 대로 순응하기는 하지만,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운명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세상이 물결치는 대로 휩쓸려 떠내려가기는 해도, 결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격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인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과에 대한 벌을 죽을 때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비록 왜곡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기에게 호소하는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번뇌에 몸부림치며, 불안해하고, 도피하고 싶어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살아야만 하는 생의 과제를 부둥켜안고 고민하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와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야곱 이야기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야곱의 얼룩진 인격을 전혀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은 도덕적 완전과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 삶을 사는 인간,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도전하여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약속이 계승된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3. 그렇습니다. 우리는 씨앗이 뿌려진 길가 일수도 있고, 돌짝밭 일수도 있고, 가시덤불 일수도, 좋은 땅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 악마가 와서, 우리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눅 8,11-15). 넷 중에 하나, 아니면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이었다가, 때로는 저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로 양분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호하고 복잡한 인간의 삶을 단순화하여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일종의 테러입니다.
지난 9일 오후, 박원순(64) 서울 시장의 실종소식이 전해지자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뒤이은 갑작스런 부음을 들은 후, 지금까지 가슴이 휑하고 멀미하듯이 어지럽습니다. 1994년, 대한민국에서 억울한 사람은 없어야 한다고, 참여연대를 만들면서 그를 사무총장으로 영입한 개인적 인연도 그렇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인권과 참여민주주의, 혁신과 소통과 협치를 추구하면서도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그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저만이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박시장이 숨진 뒤, 성추행 의혹으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일 해왔던 이들은 슬픔과 함께 당혹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의 삶이 서로 다르게 평가되겠지만, 난무하는 온갖 가짜뉴스와 억측으로 한 인간의 죽음이 희화화되는 것은, 고인과 유족에게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길 것입니다. 고인과 고소인이 또 다른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의 죽음의 이유가 어쨌든, 지금은 애도(哀悼)의 시간입니다. 누구의 죽음이든, 어떤 죽음이든, 죽음은 본인과 가족, 그를 사랑한 모든 이들에게는 우주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감옥에서 남긴 시, ‘자유의 도상에 있는 정거장’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은 영원한 자유에의 도상에 있는 마지막 정거장입니다. 이제 그는 ‘덧없는 육신과 현혹된 영혼의 무거운 사슬과 장벽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그러나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는, 지금 다만 애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죽은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뿌려진 씨앗의 비유가 본래 의미하는 것처럼,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땅이냐, 어떤 땅 위에 서 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있는 땅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구원에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좋은 땅,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을 거두는 땅, 역사의 종말과 함께 임재할 하나님 나라의 결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랍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 질서의 대조(안)적 역전에 대한 희망, 곧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만이 길가건, 돌짝밭이건, 가시덤불이건, 어떤 상태에 있는 인간이든지 구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 개인의 구원이건, 나라의 구원이건 – 도덕률(성)의 성취, 율법(현상유지의 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받은 존재입니다(롬 8,24).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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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 | 2020-08-09 | 성령강림후 열째주일 |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 채수일 목사 |
1033 | 2020-08-02 | 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 | 동족 대(對) 신앙 | 채수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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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 2020-06-07 | 성령강림후 첫째주일 | 하나님은 쉬셨다 | 채수일 목사 |
1024 | 2020-05-31 | 성령강림주일 |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는가? | 채수일 목사 |
1023 | 2020-05-24 | 부활절 일곱째주일 | '영생'은 무엇인가? | 채수일 목사 |
1022 | 2020-05-17 | 부활절 여섯째주일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 채수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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