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사람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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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다니엘서 12:1-3/ 히브리서 10:11-14/ 마가복음서 13:24-32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8-11-18 |
전주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G. Boehm) |
찬양1부 | 거룩하신 여호와(Isalaw)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그 날이 금빛 옷 입어(E. C. Bairstow)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내 영혼이 은총입어(J. M, Black) |
후주2부 | 내 영혼이 은총입어(J. M, Black) |
성경본문 |
다니엘서 12:1-3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히브리서 10:11-14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서 13:24-32 "그러나 그 환난이 지난 뒤에, `그 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 때에 그는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무화과나무에서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너희는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온 줄을 알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
1. 한 사람의 정체, 혹은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한 것, 혹은 남긴 것을 살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직하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들은 자칫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자랑이거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주장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AD354-AD430) 이래,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백록’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의 평가인데, 친구들의 평가만이 아니라, 특별히 적대자의 평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평가는 과장될 수 있고, 적대자들의 평가는 왜곡될 수 있어서, 다른 사람의 평가도 꼭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인 객관성은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 혹은 남긴 것에도 들어가지 않은, 친구는 물론 적대자들도 모르고, 오직 자기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정체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의 기도를 할 때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날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방식들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가장 먼저 질문을 제기한 인물은 아버지 요셉입니다. 그는 약혼했지만 같이 살기도 전에 임신한 마리아의 배속에 있는 아기가 과연 누구의 아기인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고 생각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 그것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첫 번째 증언입니다: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 1,20-21).
요셉이 본 예수,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이름을 얻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요셉보다 더 먼저 예수님의 정체를 물은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그의 약혼녀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고지를 들었을 때, 아마 마리아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약혼자와 상관없는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이 유대 사회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던 마리아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눅 1,30-32).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는 위대한 인물,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일군주, 다윗을 이은 왕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마리아는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미래에 왕이 될 아들을 낳게 될 어머니의 기쁨이 현재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순종은 죽음을 무릅쓴 큰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의 첫 아들, 예수의 운명이 전혀 다른 의미의 왕이 될 것임을 곧바로 듣게 됩니다.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을 치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애타게 그리스도를 기다려온 인물이지요.(눅 2,26). 그런데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팔로 받아서 안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눅 2, 29-32).
아기 예수의 부모를 축복한 뒤에,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눅 2,34-35).
시므온은 아기 예수에게서,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은 인물’,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을 드러내 많은 이들의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되고, 바로 그 일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칼로 찌르듯이 아프게 될 아들을 본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수많은 메시아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유대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약속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적 메시야만이 아니라, 금욕과 율법의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지도자들도 있었고, 기적을 행하는 카리스마적 치유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례자 요한의 회개운동과 세례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같은 성격의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요 1,33-3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6)을 보았습니다.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들은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보게 했습니다: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2-3).
예수님은 그렇다, 아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 11,4-5)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할 사건들, 치유와 부활, 가난한 사람이 기쁜 소식을 듣는 사건들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가 있다면, 요한이 철저한 금욕생활을 한 반면, 예수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한다.”(마 11,18-19).
‘먹보에 술꾼’, ‘세리와 죄인의 친구’, 이것이 사람들이 본 예수님의 한 정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 치유자’도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 16,14).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님)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인물로 보았을까요?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랍비’(선생님)로 불렀습니다(요 1,38;3,2;3,26;4,31). 시몬 베드로도 예수님을 ‘랍비’로 불렀고(막 9,5;11,21),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을 맞출 때에도 ‘랍비’로 불렀습니다.(막 14,45).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마 16,16). 이른바 최초의 메시야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명하시고(마 16,20), 곧이어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마 16,21).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 번의 수난예고가 있었지만, 제자들은 왜 그리스도가, 수많은 이적을 행하신 예수께서 왜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사렛 예수님에게서 다윗의 영광을 재현할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던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충격이자, 배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인물로 보았을까요? 예수님이 처음으로 만난 적대자들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본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막 2,4-7). 율법학자들을 격분시킨 또 다른 행동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신 것입니다.(막 2,16). 마침내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 후, 바리새파 사람들은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막 3,6).
유대 지도층 인사들이었던 대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 헤롯 당원들에게 예수님은 ‘율법파괴자’, ‘하나님 모독자’(막 14,64),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막 15,31)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의 제국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눈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보였을까요? 식민지 종주국인 로마 제국의 총독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인물이라기보다는 귀찮은 인물로 보였을 것입니다.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바라바보다 훨씬 덜 위험했을 것입니다.(막 15,7). 그러나 선동된 대중들을 만족시켜 주려고 빌라도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 다음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주었습니다.(막 15,15). 그에게 예수님은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메시야 운동들 가운데 한 소종파의 지도자, ‘유대인의 왕’(막 15,26), 결코 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작은 인물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2.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알아봤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복음서 가운데 특히 ‘나는 왔다’는 말씀과 결부된 예수님 자신의 증언들입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 1,38).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 막 2,17; 눅 5,32).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 12,47)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고,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이며, 그 길에 이르는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 일을 위하여 주님은 생명을 파괴하는 악령을 축출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님), ‘예언자’, ‘하나님의 아들’, ‘주님’ 등으로 불렀으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오직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어디에서 유래했고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왜 굳이 이 칭호를 사용하셨을까요?
‘사람의 아들’은 아람어 ‘바르-나샤’(bar-nascha), 히브리어 ‘벤-담’(ben-dam)의 번역인데, 인간 일반, 곧 인간에 대한 총칭으로, 혹은 ‘어떤 사람(불확정한 의미)을 의미하고, 드물게는 ‘나’를 달리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유대 묵시문학, 특히 다니엘서 7장에서 숭고한 심판자의 존재를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 주전 167년부터 164년 사이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니엘서 7장에 의하면, 사자와 곰과 표범, 그리고 초자연적인 괴물로 상징되는 당시의 강대국들, 곧 메디아,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시리아를 없애버리시고, 하나님은 통치권을 ‘인자 같은’ 이에게 넘겨,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7,18)과 ‘이스라엘 백성에게’(7,27) 이양한다는 것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식민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의 비참한 상황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반영된 묵시문학인 다니엘서에서 ‘인자’로 표상되는 메시야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현재 활동하는 메시아’, 곧 죄를 용서하는 권세와 안식일 위반의 권세를 가진 메시아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래의 인자’인데, 그는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고, 구름을 타고 오실 분입니다. 끝으로 ‘고난 받는 인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예수님이 바로 이 ‘사람의 아들’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통용되던 여러 메시아 칭호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자신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자기에게서 다윗 왕국을 복원할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는 잘못된 메시아 대망을 수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초월적 존재인 하늘에 있는 인자를 이 세상에서 대표하고, 현재 속에서 ‘미래의 인자’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인자를 이 세상에서 대표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눅 6,5; 막 2,27-28),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눅 19,10)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속에서 ‘미래의 인자’를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예상하지 못하는 시기에 갑자기 찾아올 때,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때’(막 13,24),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면서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으는’(막 13,26-27) 구세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급작스런 도래는 불법을 행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심판이지만(마 13,41-42),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다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니, 선택된 사람들이 할 일은 다만 깨어 있는 것입니다.(막 13,35). 세상에 휩쓸려 살지 말고, 시대의 표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3. 오랫동안 메시아 대망과 결부된 재림신앙은 집단적 차원에서 우주적 파국과 지구의 파멸이라는 재앙과 환난으로, 개인적 차원에서는 불 아궁이에 쳐 넣어져 울며 이를 가는 지옥행 또는 천국행과 연계되어 이해되었습니다. 특히 심각한 기후변화로 지구의 파멸과 인류의 멸종이 점차 현실이 되어간다는 위기의식도 미래에 대한 묵시문학적 전망을 더욱 부추깁니다. 그럴수록 사이비 종말론자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준동(蠢動)도 더 심해지고 사람들을 홀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막 13,2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구세주들과 달리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러, 자기를 한 없이 낮추시고(빌 2,8),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히 10,12), ‘고난 받는 인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시고(히 10,12),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신,’(히 10,14) ‘미래의 인자’가 되셨습니다.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 진정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이 행하는 표징들과 기적들이 아니라(막 13,22), 그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하여 진실로 자기 몸을 드리느냐, 드리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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