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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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역대지하 1:7-12/ 데살로니가전서 5:14-24/ 마태복음서 7:7-12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8-09-30 |
예배 | 주일 |
전주 | 주께 감사드리나이다(G. F. Händel) |
찬양1부 | 감사 노래(김순세)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찬양하세 오 예루살렘(J. H. Maunder)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다 감사드리자(arr. S. Vaan) |
후주2부 | 다 감사드리자(arr. S. Vaan) |
성경본문 |
역대지하 1:7-12 그 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 이제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으니, 이제 지혜와 지식을 나에게 주셔서, 이 백성을 인도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소원이 그것이구나. 부와 재물과 영화를 달라고 하지 않고, 너를 미워하는 자들의 목숨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하지도 않고, 오직 내가 너를 왕으로 삼아 맡긴 내 백성을 다스릴, 지혜와 지식을 달라고 하니, 내가 지혜와 지식을 너에게 줄 뿐만 아니라, 부와 재물과 영화도 주겠다. 이런 왕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다시 없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4-24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 하십시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7:7-12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
1. ‘추수감사절’은 1620년,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미국 플리머스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첫 번째 농사의 결실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고자 축제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23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추수감사절을 공식 명절로 선포한 이래, 미국에서는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의 수확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축제는 나라마다 시기와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어쩌면 인간과 역사를 같이하는 가장 오래된 문화적, 또는 종교적 전통의 하나일 것입니다.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고대 고구려에서는 ‘동맹’(선조인 주몽신과 그의 어머니 하백녀, 하늘의 신에게 감사하는 축제), 고대 부여에서는 ‘영고’(온 백성이 추수를 마친 뒤 가무와 음주를 즐기고,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는 축제)라는 이름의 제천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형식과 뜻도 조금씩 변했지만, 우리나라의 ‘추석’, 중국의 ‘중추절’, 러시아의 ‘성 드미트리의 토요일’(11월 초순 조상성묘, 추수감사), 독일의 ‘에른테당크페스트’(Erntedankfest) 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켜야 했던 가장 큰 축제도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출 23,14).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유월절 혹은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축제였습니다. 맥추절은 양력으로 5월에서 6월 사이에 수확한 보리농사에 대한 감사, 수장절(출 23,16) 혹은 초막절 축제는 9월에서 10월 사이, 가을에 마지막 추수가 완성될 때에 지킨 축제였습니다.
미국교회의 선교를 받은 한국교회는 1921년 감리교와 장로교회의 협의에 의해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왔는데, 우리 교회는 복음의 토착화 정신에 의지하여 우리 민족 명절인 추석에 맞춰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사실 오랜 농경문화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농업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고, 농촌에 사는 사람들보다 도시에 사는 인구가 더 많은 시대, 특히 도시교회에게 ‘추수감사절’은 추수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것을 제단에 올린 것은 아니지만, 지난 시간동안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제단 앞에 가져왔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과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고,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를 도와준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이웃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우리를 슬프고 아프게 했던 일들에 대한 감사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남기고 싶은 기억도, 잊고 싶은 기억도 감사와 함께 가져왔습니다.
까닭은 이 모든 것이, 슬픈 일이건, 기쁜 일이건 모두, 오늘의 우리 자신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은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가?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 처해도 배우는 자세를 갖는 사람!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입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가을과 함께 무르익은 곡식과 향기로운 과일과 싱그러운 야채처럼, 우리의 삶도 주님 은혜 안에서 한결 성숙해지고, 우리의 인품은 널리 향기롭고, 몸은 비록 시간과 함께 낡아지지만 마음은 더욱 싱그럽기를 소망하면서 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감사는 회상으로 시작되지만, 소망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감사입니다.
2. 그래서 예수님은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마 7,7-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찾지 못하는 것은 찾지 않기 때문이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문을 두드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주시고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악한 부모도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마 7,11)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단순합니다. 세상에 있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유비한 것이지요. 우리는 다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해서, 기독교 비판가들은 기독교를 ‘노예의 종교’, ‘유치한 환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비판은 기독교 밖으로부터만 제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고, 우리가 아무리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 믿음과 정성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우리가 잘못된 기도를 해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가 틀린 것을 찾고 엉뚱한 문을 두드렸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셨거나, 듣지 않으셨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없지요.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들으시는 주님께서 우리 기도를 외면하시거나 듣지 못하실 수는 없지요. 다만 주님은 우리의 기대대로,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식만으로 응답하시지 않을 뿐입니다. 아니, 우리가 원했던 것보다 더 나쁜 결과로 응답하시기도 하고, 응답하지 않으심으로써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나쁜 결과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는 것을,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심으로써 사실은 응답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깨닫게 되지요.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니 걸어온 모든 길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사막 위에는 오직 한 사람만의 발자국이 보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고통스럽고 험난했던 세월, 온 삶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고 비틀거릴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냐고 항의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업고 사막을 걸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3. 부왕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날 밤, 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
그 때,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구합니다.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심지어는 모든 형제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어렵게 쟁취하면서 왕위에 오른 왕이라면 구했을만한 것들, 곧 ‘부와 재물과 영화, 원수들의 목숨, 장수(長壽)’를 솔로몬은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솔로몬에게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지식은 물론, 부와 재물과 영화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이런 왕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다시 없을 것이다.’(역대지하 1,12)는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구한 그에게 부와 재물과 영화가 덤으로 주어진 것이지요. 역대기 사가가 친왕정체제적인 역사관을 가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솔로몬 왕의 사람됨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보다 더 큰 하나님의 백성을 보았고, 그래서 자기 개인의 소원보다 더 큰 소원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람의 됨됨을 알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과거, 그의 현재를 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평가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의 소원, 그의 희망, 그의 꿈을 보면, 우리는 그의 사람됨과 그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의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만 걱정하고 원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0-33).
예수님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우리를 초현실주의자나 산에서 이슬이나 먹고사는 산신령으로 만드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르고 계시다면 걱정해야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막 11,24).
미국의 연설가, 밴 크로치는 그의 책, ‘아무 것도 못 가진 것이 기회가 된다’(윤규상 역, 큰나무, 2014)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믿는 만큼 젊고, 의심하는 만큼 늙는다. 자신감을 갖는 만큼 젊고, 두려워하는 만큼 늙으며, 희망하는 만큼 젊고, 절망하는 만큼 늙는다.’
어디 젊음과 늙음만 그렇겠습니까! 사람의 육체는 그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에 따라 결정되지만, 사람의 정신은 그가 시련 속에서도 무엇을 꿈꾸는지에 따라 결정되고, 믿음으로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지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힘’은 ‘값싼 낙관주의’, 미래의 우연성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서 옵니다.
4.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째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권면했을 때,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무풍지대에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후 49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는 이른바 ‘글라우디오 칙령’이 공포된 해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 로마의 유대 사회 내부의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소요와 폭동을 동반한 투쟁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글라우디오 황제(AD 41-54)는 이런 소요에 연루된 유대인들은 반드시 로마를 떠나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추방령 때문에 바울은 로마로 가는 계획을 변경, 고린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습니다(행 18,1-2). 고린도에서 이들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교를 한 바울은 유대인들의 박해로 고난과 역경에 시달렸지만,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소망과 인내에 대한 소식은 그를 기쁘게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처음 공동체를 세웠을 때의 상황에 비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놀랄 정도로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살전 1,7), 기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무질서하게 살면서, 지도자들의 훈계를 경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 죽은 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에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살전 5,14).
외적인 박해가 심할수록, 임박한 재림에 대한 열광적 믿음을 강화하고, 그런 믿음이 현실을 외면하게 하고, 세상을 부정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 재림의 날이 도둑처럼 온다는 것만 알 뿐, 시기와 때를 확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 취한 사람처럼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우리는 무엇인가 받았을 때 감사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고 찾는 것을 주시고,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주실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바치는 헌금으로 먹고 사시는 분이 아니지만, 달리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어, 옛날에는 희생동물로, 지금은 헌금으로, 선교와 봉사로,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바침으로써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최고의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행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셨을 때, 우리가 감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감사에 감사로 응답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살전 5,16-18)이라고 합니다. 슬플 때에도 기뻐할 수 있고, 응답이 없다고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실패와 고통스러운 일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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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2019-09-22 |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 채수일 목사 |
12 | 2018-09-30 |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 채수일 목사 |
11 | 2017-10-01 |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 채수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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