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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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살아나셨다”
성경구절 사무엘기상 2:7-10, 고린도전서 15:12-18, 마가복음서 16 :1-8t
설교자 박종화목사
예배일 2008-03-23
예배 부활
전주 승리하셨도다 알렐루야(G.P.Palestrina)
찬양1부 사망권세 깨치고(G.J.Elvey)
지휘자 박수길
반주자 채문경
찬양2부 주 부활하신 날(C.Mueller)
지휘자 최승한
반주자 신채우
후주1부 주가 오늘 다시 사셨도다(D.Bish)
후주2부 주가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G.Young)
성경본문 사무엘기상 2:7-10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으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핌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이 것이다. 그분이 땅 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 놓으셨다.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2-18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6 :1-8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1)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또는 `안식일 첫날`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그들은 뛰쳐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아멘
오늘은 정말 즐거운 날입니다.
오랜만에 저희들이 부활의 생명을 맛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보통 절기 때의 예배는 저희들끼리 드렸는데, 오늘은 상징적이긴 합니다만, 먼저 가신 분들과 살아있는 저희들하고 같이 지금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 간 분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 꽃으로, 흰 백합으로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인간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이 없으면 자기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지도 않았고 그리스도를 죽게 하지도 않았고 부활시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너무나 사랑이 크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보내서 죽고 부활하게 했습니다. 본래 뜻은 저희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서 부활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먼저 죽고, 먼저 부활시켰습니다. 그 말을 오늘 고린도전서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 인간의 부활이 없이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필요치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살아나시면서 이렇게 선언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서 부활했느냐 하면 죽은 자들과 같이 있다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셔서 우리한테 부활의 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잠시 어디 이상한데 있는 게 아니라, 지옥이라 이름하는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과 함께 있다가 먼저 나왔습니다. 왜 나왔느냐? 죽은 자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고 죽은자들 한테도 가셨고. 그리고서 그들 가운데서 먼저 나왔습니다. 여기 제단 앞에 흰 백합화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흰백합화로 이런 주님의 구원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표출합니다. 그 분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부활한 나는 산 자들과도 함께 있어야 하겠다. 산 자들도 죽을 건데 산 자들도 내가 영원한 생명이라 이름하는 구원으로 이끌어야 하겠다. 그래서 내가 산 자들과도 함께 구원의 주가 되고 싶다"고 말입니다. 산 자들한테 그리스도가 있고, 죽은 자들한테 그리스도가 계셨고, 똑같으신 분이 오늘 부활하신 날 아침에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은총이 진실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부활을 위하여 먼저 부활하셨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이 있으면 오늘 예배가 복됩니다. 그 양반이 부활하셨든지 말든지 내 부활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면 예배가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구원을 필요로 하십니까? 어차피 죽을텐데 죽음을 이기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그리스도를 받으십시오. 필요하지 않으면 그냥 기념하고 맙시다. 부활하고 싶으십니까?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고 싶으십니까?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받고 싶으십니까? 부활을 보장 받고 싶으면 오늘 주님이 먼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한 사건을 만드셨습니다. 그 사건은 금요일 날 저녁 때 만든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요처는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마지막 호소를 했습니다. 이 죽음의 잔을 좀 피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종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부탁 하셨습니다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안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엉합니다: " 다 이루었다". 그 후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여전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실 때 하나님은 말로 대답 안하시고, 사랑의 가슴으로 죽은 아들을 자기 살아있는 가슴 속에 끌어안는 행동으로 답하셨습니다. 침묵의 답입니다. 입으로는 침묵하셨지만, 가슴의 사랑으로 답하셨읍니다. 죽어가는 아들의 호소를 받아 살아있는 가슴에 담았습니다.

사실 먼저 간 자식은 어디다 묻으시는지 아시죠? 먼저 자식이 가면, 자식은 반드시 부모의 가슴에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대신 죽어간 자식,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랑의 가슴 속에 묻는 것으로, 그래서 침묵으로 대신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깨닫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는 방식으로 다 이룰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했는데, 이루어지자마자 성전에서 사건이 생깁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현장은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라 이름하는 언덕, 라틴말로는 갈보리 언덕, 그리고 히브리말로는 골고다 언덕 입니다. 골고다, 갈보리 언덕은 예루살렘 성 밖의 언덕 입니다. 여기서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밑의 주변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뭐가 이루어졌을까, 하고 궁금하던 차에 성 안에서 사건이 생겼읍니다. 예루살렘 성의 중심인 성전의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지성소와 성전본당을 막았던 휘장이 찢어지고, 지성소에 있던 율법, 법궤, 하나님의 가장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움이 우리한테 밝히 드러났습니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율법궤가 밖의 사람들한테 보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휘장 안에 감추어 계셨던 하나님이 찢어진 휘장을 통하여 속된 우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성전 휘장이 찢어짐의 진실입니다. 다 이루어 졌읍니다. 성과 속이 만나게 되었읍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게 되었습니다다. 삶과 죽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읍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이미 죽으실 때부터 만남, 소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성 금요일 저녁에 말입니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사건이 금요일 저녁에 벌어졌습니다.

요즘 우리 고전을 보니까 하늘을 아는 방법, 하늘과 소통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고 그럽디다.
하나는, 하늘을 아는 것으로 지천, 우리교회 남신도회 그룹가운데 지천회라는 이름도 있었죠. 하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을 알면 하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천의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낙천의 방법, 사랑하면 하늘이 좋아집니다. 하늘을 즐깁니다. 즐거울 ‘낙’자입니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서로 즐겁게 살게 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친천, 하늘과 친해진다고 그러더군요. 서로 가까이 관계 맺고, 옆에 두고, 앞에 두고 삽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여기와 어떻게 관련될가요. 지천, 낙천, 친천, 그것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면 뭐가 어떻게 될것 같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늘을 즐기며 삽니다. 하늘을 품고 삽니다. 하나님은 땅을 끌어안습니다. 그 분은 인간을 안고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삽니다.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하늘을 사는 것. 그것을 ‘생천’ 이라 한다면 되겠습니까? 지천, 낙천, 친천, ‘생천’, 하늘을 삽시다. 하나님을 삽시다. 하나님의 뜻을 삽시다. 그것이 오늘 다 이룬 부활의 한 메시지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이루어졌던 이 사건이 부활절 아침이 되자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를 찾으러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 그 외에 여러 여성들이 골고다 언덕 무덤가로 가 보았습니다. 돌문으로 잠겨져 있던 문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 짐승이 시신을 먹을까봐, 강도들이 들어와서 시신을 빼갈까봐 무거운 돌문으로 잠궈 놨는데, 돌문이 열리고 돌문 위에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앉아있으면서 하는 말, “왜 죽은 자를 산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합니다. 무덤은 죽은 자가 있는 곳인데, 죽은 자가 있는 무덤에서 왜 산 자를 찾느냐고 말이죠. 그 분은 부활하셔서 지금 밖에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중요한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서 또 하나의 소통이 생겼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가 있는 곳, 산 자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덤 문을 누가 열면 되겠습니까? 죽은 자가 무덤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흰 옷 입은 천사가 열었답니다. 하늘은 뭐냐고 하면, 땅에서 막힌 것을 가리킴니다. 막힌 것을 터줍니다. 막힌 돌담을 빼내는 것이 하나님의 역할입니다. 부활이 뭐냐고 하면, 하나님은 막힌 문을 열어놓았다. 열었다. 인생의 문을, 세계 역사의 문을 다 열었다. 어서들 나와라,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덤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다는 현실입니다. 신앙을 줬는데, 살려놨는데, 왜 안 나옵니까? 뭐었들 하십니까? 거기서? 고통스럽다고요? 인간의 삶이 비극적이라고요? 염세주의가 됐다고요? 그러면 그 곳에 계십시오. 주님이 아무리 문을 연들 나오시기 싫으면 그 곳에 계세요. 하지만 나오시려면 뛰어나오세요. 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문 열어주는 데까지만 부활의 능력을 주십니다. 나오고 안나오고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요,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를 가지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 우리 마음을, 그래도 현대인들의 뇌리를 가장 즐겁게 하는 말이 `적극적 사고` (Positive Thinking)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게 뭔가 알아봤더니 염세적으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삽시다, 그런 이야기 입니다. 맞는데요, 오늘 돌문 이야기를 보면, 적극적 사고가 행복이 길이 될 수 있는 조건이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조건은 제가 보기에, 문이 열려야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 복잡한 고난의 문은 제가 스스로 열 수가 없고, 그 문은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하고, 우리는 열린 문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나와서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문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다음에 적극적으로 사고하며 또 그렇게삽시다. 자기가 문 열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적극적인 조건이 있을 겁니다. 산 자는 무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경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니라 역경을 뚫고 나와야 합니다. 나오지 않으면 적극적 사고를 할 수도 없고, 무덤이 적극적 사고와 긍정적 사고가 있어야 할 장소도 아닙니다. 나오세요. 함정에서 나오세요.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던지고 세계로 한번 다시 나오십시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나옵시다.

세 번째도 조건이 있을 것입니다. 나와 보면 그 곳이 미래의 비젼을 펼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와보니 그곳이 희망의 세계입니까? 나와 보니 또 다시 고난의 세계입니까? 나와 보니 그 곳이 절망입니까? 나와 봤더니 우리 앞에 희망이 보입니까?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신뢰의 희망이 보입니까? 이런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 저는 적극적 사고를 하고 적극적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냥 적극적으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빈 공간에서 말입니다. 무덤 속에서는 적극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무덤 문이 열리면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결단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것입니다. 문을 열어주마. 막아놓은 휘장 잘라서, 휘장을 찤어서 하나님을 보여주마. 막힌 돌문은 열어주마.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신앙적 결단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우리한테 요구하십니다.

우리말에 ‘목숨’이라는 말이 있는데, 본래 목숨이라는 말의 원형은 국어학적으로 이렇답니다. "몸으로 사는 생명" 인데, 몸숨, 몸으로 쉬는 숨인데, 그섯이 몸으로 사는 것, 그러다가 ‘몸숨’이 ‘목숨’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런가하면 얼로 살고, 혼으로 살고, 정신으로 사는 생명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몸으로 살고, 얼로 사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얼"은 말을 합니다. 생각을 항상 "말"로 표현합니다. ‘말숨’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나왔습니다. 동양적인 해석이라고 봅니다. 그대로 받아보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고, 말씀은 행동이 됩니다. 말은 언어가 아니라, 말은 현실이고, 말은 실천입니다. 말은 얼로 살고 몸으로도 삽니다. 몸숨 속에 말숨이 들어가면 합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이 합한 인격이 이루어집니다. 말씀은 현실이고, 역사고, 미래를 만들어냅니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의 요체는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고 싶으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나와 함께 그 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의 모든 구원역사의 핵심이 다 담겨있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오늘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릴리에 왜 가셨습니까? 부활하셔가지고 구름타고 승천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죽었다가 살아서 하늘로 올라 가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옛날에 일하던 갈릴리로 돌아갑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이유는 내가 그토록 약속했던 부활이야기, 십자가 고난의 이야기가 진실로 타당하고 현실임을, 실질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확증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았던 곳을 한번 되돌아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 막혔던 소통의 길을 다시 뚫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 말씀이 육신이 된다고 믿었던 사람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복음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 이들 한테는 "부활"은 꿈꾸고 바라던, 앞으로 있을 미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죽은 다음의 부활, 언젠가는 부활한다고 하는 미래에 관한 희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갈릴리 사람들의 "오늘"의 현실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께서 죽으셔서 부활하시고, 그의 부활에 동참하고픈 희망을 갖고 살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믿는 미래의 부활, 갈릴리 사람들이 믿었던 미래의 부활의 미래를 "오늘"이라는 현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부활하신 분이 전에 함께 살았던 오늘의 역사 현장으로 다시 가서 하는 말이, 부활은 내일의 것, 미래의 것이지만, 그 미래는 머나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만져볼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미래라고 하십니다. 오늘 만져볼 수 있는 축복이고, 오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부활이 "오늘"의 갈릴리로 들어갔습니다. 종말의 사건이 현재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엄청난 우리의 신앙고백적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 머나 먼 미래에 있습니까? 만질 수 없는 "머너 먼 허망",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오늘 제가 만져볼 수 있는,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가까운 희망"이 하나님 나라지, 먼 허망은 저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분이 하시는 일은 이것입니다. 부활하신 분은 미래 희망이요, 우리의 장래희망이지만 그 분은 지금, 오늘 우리 속에 오셔서 십자가 아래서 고생하는 우리들한테 오셔서, 무덤 문을 여시고, 휘장을 찢으시고, 저희들한테 생명의 소통을 시켜주신다고 합니다.
부활을 미래 희망으로만 보지 마시고, 저희가 오늘 즐길 수 있는, 오늘 맛볼 수 있는, 오늘의 은총으로 여기십시오. 부활은 오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은혜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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