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참으신 분"
_채수일 담임목사
1. 히브리서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은 초대교회에 대한 1차 박해가 지나가고 2차 박해가 시작된 때로 추정됩니다. 주후 70년 로마제국과의 전쟁에서 유다는 완전히 패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그동안 유지되었던 유대교의 율법준수와 희생제의에 의한 구원이 치명적으로 위협을 받게 된 것이지요. 살아남은 유대 지도층 인사들은 무너진 성전 대신에 회당을, 해체된 국가의 자리에 교육을, 해체된 왕조 대신에 가부장제를, 해체된 희생제의 대신에 율법연구와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해야 했습니다.
이런 전환은 주후 90년, 이른바 ‘얌니아 회의’에서 확정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야브느엘’로 등장하는 얌니아는 텔아비브 남쪽 20km에 있는 성읍입니다. 얌니아가 주목을 받는 것은, 예루살렘 멸망 후, 유대교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곳에서 회의를 소집, 구약성경의 정경을 확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을 이단으로 저주하고 파문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대교 회당에서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그리스도교 이단에 대한 저주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한 때 공존했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서로 결별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유대인은 왜 그리스도인을 저주하고, 파문했을까요? 과격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에 맞선 유대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고,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과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주의, 구원의 보편성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먼저 유대인들로부터 저주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가혹하고 광범위하게 시행된 박해는 주후 60년대 네로 황제(AD 37-AD68) 치하에서 먼저, 그리고 주후 90년대의 도미티아누스 황제(AD 51–AD 96) 치하에서 두 번째로 일어났습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의 박해는 주후 64년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후 64년 6월 19일 발행하여 7일간 계속된 로마시의 대화재로 도시의 3분의 2가 소실되었습니다. 로마시의 빈민가는 대부분 목조로 지어진 아파트 형태였기에, 바람이 불면 크고 작은 화재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빈민가를 철거하고 새로운 궁전을 만들려고 했던 네로가 방화했다거나, 화재를 방치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지요. 당황한 네로 황제는 로마 시민들의 분노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 삼아, 테러를 용인한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로마사가 타키투스조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참혹한 핍박과 박해는 네로 황제의 광적인 잔혹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성만찬을 식인 풍습을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혐오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과 민족과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처럼 대하는 것도 로마인에게는 반인륜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함으로써 무신론자들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두 번째 박해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함으로써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 충돌했고, 그 결과 유일신 신앙을 지켰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큰 박해를 받은 것이지요. 로마 제국에서는 선정을 베푼 황제들을 죽은 후에 신으로 추앙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BC 63-AD 14)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지만, 고대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신격화는 그렇게 혐오스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충성스런 로마 시민은 신전에 황제 상을 세우고 향불을 피웠지만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의 이런 행동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극력한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반유대교 법령들을 발표하여 유대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고, 유대인이 내는 예루살렘 성전세를 로마 주피터 신전의 유지비로 사용했습니다.
2.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유다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멀리 소아시아 지방에까지 미쳤습니다. 이 때, 사도 요한은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히브리서도 이 시기의 박해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서신의 수신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당했던 박해를 회상시킵니다: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 여러분은 때로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히 10,32-34).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그리스도인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는데, 어떻게 다시 어두운 옛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신앙 때문에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참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박해와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들보다 앞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 받은 믿음의 조상들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노아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장 시대, 사사 시대, 왕정 시대를 거쳐 마침내 기원전 2세기 말, 유대의 종주국인 시리아의 황제 안티오쿠스 4세 에파파네스(BC 215- BC 164)의 엄청난 박해를 회상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 장군이 분할 통치한 시리아의 네 번째 왕이었던 그는 헬레니즘 문화를 유대인들에게 강요, 할례와 제사를 금했고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는가 하면 제단에 돼지를 죽여 피를 흘리기도 했지요. 유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고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제우스 신의 현현으로 주장하기 위해 ‘에피파네스’(신이 등장했다는 뜻)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에게는 그리스도 이전의 박해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녔습니다.’(히 11,35-37).
3.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가자고 권면합니다(히 12,1).
증인은 단순히 목격자가 아닙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알리고, 그에 대하여 자기 자신, 마침내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순교자들을 본받아 원형경기장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라는 것이지요. 달리기 선수는 덕지덕지 몸에 무엇을 걸치고 달리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옷만 입어야 합니다. 믿음의 달리기에 나선 신앙인도 근심과 걱정, 혹은 게으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찌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신앙인도 육체를 가지고 있고, 세상 안에 있는데, 어찌 세상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얽매는 죄도 벗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죄’라는 헬라어 단어, ‘하마르티아’가 ‘표적을 빗나가다’, 또는 ‘그릇된 표적을 맞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만이 아니라, 마땅히 맞춰야 할 표적을 지향하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지요. 미워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과 같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과 같지요. 그러므로 목표를 흐리게 하는 것, 표적만 보지 못하게 우리를 얽매는 모든 것을 달리기 선수가 쓸데없는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살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살다보면 쓰레기가 된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지 얻으려고 빠르게 달리지만, 마침내 얻은 것 놓치지 않으려고 주저앉으면,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다.’(히 12,2)고 합니다.
경주에 나선 사람은 오직 목표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달리기 경주의 목표인 상이나 면류관을 말하는 대신,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상 경주의 목표가 성공과 출세, 칭찬과 명예, 과시와 지배에 있다면, 신앙 경주의 목표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 하여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 분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고(히 5,9), ‘앞서 달려가신 분’(히 6,20), ‘새 언약의 중재자’(히 9,15),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시는 분’(히 7,25), ‘새로운 살 길’(히 10,20)이자, 마침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것입니다(히 12,2).
‘창시자’라는 개념에는 구약성경의 ‘통치자’ 모티브가 함축되어 있고, ‘지도자로서 앞서 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완성자’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관계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데, ‘목표로 이끌어 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고백은 달리기 선수가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성취하는 행동을 그리스도의 앞서가심과 인도하심에 결합함으로써, 박해와 고통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극심한 시련을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내다보시고,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지기로 결정되어 있고, 그의 수난에 이어지는 ‘높이 올리우심’,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심’ 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보상하셨듯이, 신앙인들을 반드시 ‘기쁨의 세계’에 받아들이십니다. ‘70인역 성경’에 의하면 ‘기쁨’(kara)라는 개념은 종말론적 구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아 빠져나온 수치와 추방상태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다가 약속된 예루살렘 도성으로 되돌아 올 때, 그들이 가졌던 영원한 기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주에서 승리한 이들에게 상을 주듯이, 하나님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믿음을 지킨 이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한 신앙인들에게 반드시 보상하십니다. 그 보상,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으신 주님과 함께 있는 기쁨이지요. 이런 기쁨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기쁨 외에 무엇이 박해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인내를 줄 수 있겠습니까?
4.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고난절을 그리스도교 역사상 처음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19’ 시대의 위기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BC, before Corona’와 ‘AC, after Corona’로 획을 지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언제 이 감염병이 진정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도 문제지만, 코로나 사태와 연결되는 경기침체로 인한 대량 실업, 사회적 양극화, 혐오와 배제와 차별, 새로운 형태의 국가주의와 국수주의, 약탈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의 모색과 실천, 생태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전환 등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부터 우리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상되는 변화는 물론, 보다 생태적이고, 보다 공생적인 세계질서를 모색하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수난절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은혜와 자비로 이들을 품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코로나에 감염된 환자들을 돌보다가 목숨을 잃고, 감염되어 고통을 받는, 그리고 이들의 치료를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들과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들이 밖으로부터 오는 감염병의 위협에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에 지치지 않도록 힘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재의 간구를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히 7,25).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이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한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히 9,11-12).
성전이 무너진 시대, 아니 사람 손으로 만든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새 성전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스스로 성전이 되셨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성전 없는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아니 움직이는 성전이 되신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 때문에 예배당에서 모여 예배드리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가정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면, 성령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면서,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낙심하여 지치지 않고, ‘코로나 시대’를 극복합시다.
번호 | 예배일 | 설교제목 | 설교자 |
---|---|---|---|
40 | 2025-04-18 | 성 금요일 음악회 / 십자가상의 죽음 | |
39 | 2025-04-17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세족과 성찬 | 임영섭 목사 |
38 | 2025-03-05 | 성회 수요일 예배 (구별된 삶과 신앙) | 임영섭 목사 |
37 | 2024-03-28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처음부터 끝까지 | 임영섭 목사 |
36 | 2024-02-14 | 성회 수요일 예배 (그리스도의 고난) | 임영섭 목사 |
35 | 2023-04-07 | 성 금요일 예배 - 말씀 묵상과 찬양 (2부 성가대) | |
34 | 2023-04-06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사랑의 격려 | 임영섭 목사 |
33 | 2023-02-22 | 성회 수요일 예배 | 임영섭 목사 |
32 | 2022-04-15 | 성 금요일 음악예배-십자가 상의 일곱 말씀과 찬양 | |
31 | 2022-04-14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사랑의 습관 | 임영섭 목사 |
30 | 2022-03-02 | 성회수요저녁예배 | 임영섭 목사 |
29 | 2021-04-02 | 성금요일 음악예배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 채수일 목사 |
28 | 2021-04-01 | 성목요일 세족(수)식, 성만찬예배 | 채수일 목사 |
27 | 2021-02-17 | 성회수요저녁예배 | 채수일 목사 |
26 | 2020-04-09 | 성목요일 세족(수)식, 성만찬 예배 | 채수일 목사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