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셋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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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구원에 대한 감사
성경구절 이사야서 11:1-11 / 로마서 15:4-9, 13 / 마태복음서 3:1-8
설교자 임영섭 목사
예배일 2022-12-11
전주 하나님의 독생자, 주 그리스도(D. Buxtehude)
찬양1부 주 예수여 오소서(N. Cain)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오 주여 어서 오소서(N. White)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영원한 문아 들릴지어다(G. M. Martin)
후주2부 영원한 문아 들릴지어다(G. M. Martin)
성경본문 이사야서 11: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것이다.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 다시 손을 펴시어서, 그의 남은 백성들, 곧 앗시리아와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와 엘람과 바빌로니아와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남은 사람들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실 것이다.

로마서 15:4-9, 13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서 3:1-8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구원에 대한 감사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면서, 대림절과 관련하여 우리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 예수가 오신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면서, 예수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분을 만나 그가 메시아라는 걸 확증했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11장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메시아에게 주님의 영이 임하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을 빌리면,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을 것이라고 말씀만 선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먼저 자신이 정의로 허리를 동여맨 삶을 살았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 그런 믿음을 보이면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세례 요한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누가복음서 7장에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가장 큰 인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까지 꽤 오랫동안 예언자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에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인간의 음성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예수 이전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세례 요한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끊어졌던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요한을 통해 선포됩니다. 그리고 그의 선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36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교하는 장면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 내용처럼, 당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세례 요한이 앞서서 했던 사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세례 요한은 그냥 몇 백년 만에 등장한 예언자가 아니라, 사람들은 그를 제2의 엘리야로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을 엘리야 같은 예언자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서 9장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지칭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엘리야 예언자 같은 인물로 생각한 데에는, 그의 놀라운 가르침과 능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하였고, 사회의 지배계층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 출신이었고, 따라서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당연히 성전에서 일을 하는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버지의 직분을 쫓아 성전 일을 하면서, 당시의 종교권력과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탐욕을 보고, 전통적인 유대교를 떠납니다.

 

그리고 화려한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들어갑니다. 아름다운 제사장의 옷이 아니라 낙타 털옷을 입습니다. 기름진 음식이 아니라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그가 광야로 들어간 것은, 단순히 속세를 벗어나,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광야로 갔던 이유는, 사람들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을 광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광야로 들어오면, 그 광야에 담긴 의미를 몸에 새기고 그곳에서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능력을 체험하고자 광야로 들어갔고, 요한은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그의 인기가, 헤롯 왕 같은 권력자들에 의해서, 그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게 했고, 아시는 것처럼 그가 일찍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얼마나 세례 요한이 당대에 존경을 받고 주목을 받았으면,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복음서 두 군데만 등장하지만,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복음서에 나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그 탄생을 보더라도 메시아 예수의 탄생과 다를 것이 없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의 부모는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이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살았던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늦게까지 없다가 아들 요한이 생김으로써, 성경의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과 라헬, 삼손의 부모, 사무엘의 부모와 비슷한 기적과 은혜를 체험합니다.

 

누가복음서 18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나타난 것처럼, 요한의 부모에게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이며 그 이름이 요한이 되어야 한다고 알립니다.

마치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례 요한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누가복음서 115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17절을 보면,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예수가 오시는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예언이 선포됩니다.

 

이쯤 되면, 교만해질 수도 있고,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으면서 윤택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이 세례 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물었을 때, 명백하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고, 오히려 자신은 메시아의 신발끈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예수를 높이면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충실히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서 3장에 나오는,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고,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말씀, 오늘 로마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생각했던 말씀, 바로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는 이 표현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이사야서 40장에서 밝혔던,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가르쳐 주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는 사명을 충실히 지켰고, 그리고 그것이 또한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러 번 들었던 이 표현, 이 말씀을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이 나타나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선포하였는데, 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외치는 사람, 선포하는 사람이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 선포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했을 때, 그에게는 자기 자아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라지고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소리뿐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었고, 제사장의 아들 요한, 능력 있는 말씀을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인기와 인정을 받던 세례 요한은 없었던 겁니다.

 

바로 이러한 정체성이,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광야로 들어가게 했고, 털옷을 입게 했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으며 살게 했던 겁니다.

 

 

나에게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라지고 나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 나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통해 오시는 주님만이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성서학계에서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광야에 대해서 학자들이 부르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브루그만이라는 학자가 처음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말인데, 그것은 영어 표현으로 광야를 Nothing-less-ness, 이렇게 부릅니다.

Nothing없음을 의미하고 “less”“-이 없는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없음이 없는 것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처럼 보이지만, 없는 것을 다시 없다고 부정함으로써,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곳, 그래서 광야를 보통 없음이 없는 곳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유랑하던 광야, 출애굽의 광야, 세례 요한이 있었고,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시던 광야. 그곳을 비어 있지만 충만한 곳,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곳, 광야는 신학적으로 그렇게 불립니다.

 

저는 얼마 전에 세례 요한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들을 보다가, 오늘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말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것에 대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상반된 해석과 반응입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세례 요한과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회개라는 명령은 매일 저지른 잘못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구원받기 이전과 다른 삶을 사는 것, 예수를 믿고 이제는 달라진 삶의 방식이 회개였습니다.

이들에게는 세례도 평생 단 한 번 받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미 온몸이 목욕을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발만 씻는 일상생활의 거룩하고 작은 노력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는 이미 예수를 통해 주어진 구원이었고, 다시 오실 예수도 구원의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태복음서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하늘나라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명령은 매일 자신의 죄를 씻고 의롭게 되어야 하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반복해서 지켜야 하는 철저한 율법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무엇인가 채워지는 충만함. 거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도, 내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아도 만족하는 삶, 결국 그것은 심판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바로 예수가 오셔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확신, 그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고 예비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광야를 가리키는 미드바르는 말씀을 가리키는 다바르”, 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따라서 광야라는 단어, 미드바르는 바로 말씀이 있는 장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예수가 계시는 곳을 가리킵니다.

비어 있는 곳 같지만 충만한 곳, 그 광야는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우리는 거친 광야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이미 오신 예수가 베풀어주신 구원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광야를 실천하며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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