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둘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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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성경구절 사무엘기상 8:4-11/ 고린도후서 4:13-5:1/ 마가복음서 3:20-35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6-06
전주 주께 간구하나이다(J. S. Bach)
찬양1부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김순세 곡)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오 주여 내 영혼 이끄소서(A. B. Sexton)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모든 시험 무거운 짐 주께 맡기나이다(E. F. Hoffman)
후주2부 모든 시험 무거운 짐 주께 맡기나이다(E. F. Hoffman)
성경본문 사무엘기상 8:4-11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장로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어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합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3-5:1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마가복음서 3:20-35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놓고,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서 싸우면, 그 가정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갈라지면, 버틸 수 없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1.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마치고 왕정시대를 시작하는 전환기의 마지막 사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이자 제사장으로서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나이가 들자,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맏아들 요엘과 둘째 아들 아비야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고 합니다(삼상 8,1-3).

 

사무엘은 그의 스승 제사장이었던 엘리와 마찬가지로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불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도 행실이 나쁘고 주님을 무시한 아들들을 두었는데(삼상 2,12-17),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함부로 대했고(삼상 2,17),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삼상 2,22). 그런데도 자식 사랑에 눈이 먼 엘리는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삼상 3,13).

 

하나님은 마침내, 엘리의 가문에 저주를 내려,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영 씻지 못할 죄악에 대해 심판하십니다(삼상 3,14).: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네 자손과 네 족속의 자손의 대를 끊어서, 너의 집안에 오래 살아 나이를 많이 먹는 노인이 없게 할 날이 올 것이다... 네 두 아들도 한 날에 죽을 것이다.’(삼상 2,29-34).

 

엘리의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보병 3만 명과 함께 전사했고, 하나님의 법궤도 빼앗겼습니다(삼상 4,10-11). 이 소식을 들은 엘리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엘리, 자식 잘 못 가르쳐서 결국 온 가문이 멸망하는 비극을 겪은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4,17-18).

 

그런데 엘리를 이은 사사 사무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사무엘도 자식농사 망쳤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엘리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인물입니다. 사무엘 자신은 출산하지 못하던 어머니 한나가 서원기도로 얻어 하나님께 바친 아들이었는데, 사무엘은 자기 자식들을 기도와 신앙으로 양육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제사장 직분이 세습되던 시대, 사무엘의 타락한 아들들을 신뢰할 수 없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청합니다. 떠돌아다니던 반()유목집단, 일용직 노동자, 전쟁포로, 도적 떼, 노예, 채석장의 석공, 어부, 목수 등 변두리 집단을 의미하는 하비루’(Habiru)들이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200여년동안 평등한 지파동맹 체제 안에서 사사 중심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 살던 시대를 끝내고, 이방 나라와 같은 왕정체제를 원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통치와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버리고, 스스로 예속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엄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삼상 8,18-19), 더욱 강력하게 왕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말을 받아들여서 그들에게 왕을 세워 주라고 명하시고(삼상 8,22), 주전 1000년 경,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웁니다.

 

사사이자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가나안 정착 과정을 거쳐 사사시대를 종결하고, 왕정체제를 수립하는 과도기에 활동한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이렇게 결정적인 역사적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온 이스라엘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지만, 사무엘은 가정적으로는 자녀들 때문에 매우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2.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서에서 사무엘과 반대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잘못 기른 자식 때문에 불행한 부모가 아니라, 자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때문에 고난 받는 자식의 예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의 갈등관계가 그것이지요.

 

예수님과 부모와의 갈등은 사실 예수님의 잉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사건이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어떤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주었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유월절 축제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실종된 12살의 소년 예수 이야기입니다(2,42). 축제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서 뒤늦게 큰 아들이 없는 것을 알게 된 부모는 사흘 뒤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겨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놀란 어머니 마리아가 말합니다.: ‘애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그러자 예수님이 부모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2,48-50).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3,50). 누가복음서는 예수님의 부모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당황했을 부모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마가복음서에만 전승되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는 우리를 더 놀라게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는 이야기의 앞뒤에 덧붙여 전승되는 예수님을 찾아온 가족들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고 합니다(3,21). 예수와 그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는데,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무리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3,32).

 

도대체 왜 예수님의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직접 방으로 들어가 아들을 만나지 않고, 바깥에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님을 불러내려고 했을까요?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을 정말 믿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아들과 함께 모여 있는 이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이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어서 접촉하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바깥에서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자기를 찾는다는 말을 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33-35).

 

전통적인 가족주의를 해체하는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혈연중심의 가부장제와 위계적 질서로 구축된 오래된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평등한 질서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가족주의는 가족 구성원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 가부장적 질서의 유지를 중시합니다. 혼인과 출산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혈연 밖의 타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내부적으로는 정서적으로 친밀하고 폐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 사실은 가족입니다. 오랜 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적인 가족은 빠르게 해체되고 변하고 있습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하는 과정에서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이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지금은 이혼, 비혼, 저출산, 노령화, 1인가구의 증가, 한 부모 가족 또는 재결합가족, 그리고 이른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가족의 형태 자체도 크게 변했고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가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극복, 개인적 자유의 신장이라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받을 수 있고, 국가와 시장의 폭력을 버텨내는 울타리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어쨌든 가족의 변화가 가족주의를 해체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주의를 오히려 강화하는 두개의 역설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족의 순기능과 긍정적 역할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혈연과 위계질서 위에서 폐쇄적이고,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가족주의, 더 넓게는 유대주의에 대해서는 타협 없이 날카롭게 비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12,51-53)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가족 안에서 처음 예수 믿는 신자가 겪는 갈등을 나타내고, 가족 간 다툼을 조장하는 말씀이 아니지요. 이 말씀은 가족관계, 아니 자기 목숨이 제자직, ‘예수 따름에 걸림돌이 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제자들을 결단 앞에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모든 관습, , 체제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해방은 필연적으로 옛 질서와의 충돌을 가져오고, 충돌은 제자들을 고난으로 인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10,29-30)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특징은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사람과 병자, 율법학자와 일용직 노동자, 세리와 여성들에게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 가정이 파괴된 사람들, 이혼당한 여성들(10,11)과 과부들(7,12),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고아들(14,18), 도덕적으로나 신체적, 종교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가족과 법을 잘 지킨다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고,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과 결탁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물의 신’, ‘파리 떼들의 신이라는 뜻을 가진 바알세불은 인격화된 사탄의 세력입니다. 이들은 사탄들 가운데도 위계적인 질서가 있고, 위계적 질서의 맨 꼭대기에 사탄의 두목인 바알세불이 있는데, 예수께서 바로 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작은 사탄들에게 사로잡힌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갈 것이다.’(3,27)고 말씀하십니다. 힘센 자에게서 빼앗은 약탈물은 질병과 귀신에게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해방을 통해 악한 사탄의 세력은 무력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선포되는 것이지요. 이 해방은 고난 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벌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유대 지도자들의 응보사상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3,28-29)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귀신축출과 치유가 성령의 역사임을,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라고 왜곡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3. 마가가 가족들의 개입 사건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악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는 사건을 병치시킨 것은 예수님과 가족주의 사이, 예수님과 종교권력 사이의 갈등이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고, 갈등은 실제로 예수님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악령의 도움을 받아 마법을 행한다는 식의 고소를 당할 경우, 잠재적으로 사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또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그가 선교 활동에서 당한 수많은 환난과 궁핍과 곤경을 가감 없이 고백합니다. 수없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난동과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으면서도(고후 6,4-5), 그가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교를 할 수 있는 것(고후 6,6-7), 그가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고후 4,18). 비록 겉사람은 낡아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이유도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겉사람과 속사람, 고난과 영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잠깐과 영원,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대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고후 5,7). 보이지 않는 것에 희망을 걸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4,14).

 

사람이 살면서 어찌 낙심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식에게서 낙심하거나, 그 반대로 부모에게 낙심할 때도 있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오해와 낙심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올 때 더 크고, 상처는 더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오해와 낙심은 상대에게서 보이는 것만 보고, 드러난 것만 믿는데서 옵니다. 우리가 타자의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은 곳에 조금만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오해와 낙심은 한결 작아질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세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텍쥐페리가 마흔 네 살의 나이로 비행 중 실종되기 한 해 전인 1943년에 발표한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 말, 여러분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잘 가.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보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자신에 대해, 타자에 대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은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 타자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타자 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가지려고 하는 것을 찾는 사람은 결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낙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타자 안에서, 우리가 함께 찾아야만 했던 것을 찾는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와 자식들 안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요? 성취된 우리 기대, 충족된 우리 욕망일까요? 아니면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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