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
---|---|
성경구절 | 사도행전 17:22-28/ 베드로전서 3:13-18/ 요한복음서 14:15-21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5-17 |
전주 | 내 영이 주를 높이나이다(J. Rheinberger) |
찬양1부 | 주께 갑니다(R.M. Stults) 특송: 윤경희 권사, 이현숙 권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이윤영 곡) 특송: 김경원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나 주를 떠나지 않으리(J. L. Krebs) |
후주2부 | Menuet gothique(L. Boëllmann) |
성경본문 |
사도행전 17:22-28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3-18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
1. 고전기의 아테네는 주전 510년부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정복된 주전 338년까지, 철학과 예술과 교육, 민주주의의 중심이라고 불릴만한 도시국가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서구 민주주의, 서양 철학의 원천을 그리스, 특별히 아테네에서 찾을 정도로, 아테네는 인류의 정신사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아테네 시의 광장(Agora)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미터, 아크로폴리스의 중심부인 판테온 신전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발 80-90미터의 바위 언덕이 있습니다. 이 언덕은 ‘아레오바고’, 헬라어로는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불리는데, 전쟁의 신(神), ‘아레스’와 언덕이라는 뜻의 ‘파고스’가 합쳐져,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올림푸스의 열두 신들이 아레스 신을 살인 사건으로 재판한 곳이 바로 이 아레오바고였고, 이런 전통에 따라 이곳에 사법기관이 세워진 것입니다.
주후 51년, 사도 바울이 방문했던 당시의 아테네는 5천 명 정도의 시민이 있었던 조용한 소도시였습니다. 한 때 그리스의 수도로서 위대한 역사를 만든 곳이었지만,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아테네는 위대한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살아가는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아테네의 자치권을 최소한으로 한정했고, 아레오바고 법정의 임무와 권한도 청소년 교육과 학문연구에 대한 감독기능 정도의 역할로 제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 갔다’는 말은(행 17,19), 재판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토론을 위해 혼잡한 광장으로부터 조용한 아레스 언덕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 갔을 때, 바울은 거의 450년 전,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과 재판을 회상했을지 모릅니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주전 470년경-주전 399년)가 주전 399년, 재판을 받고 독배를 마신 바로 그 자리에, 지금 사도 바울이 서게 된 것이지요. 국가권력과 양심, 국가에 대한 의무와 신에 대한 의무가 충돌했던 바로 그 자리, 소크라테스라는 이름과 결부되었던 세기의 법정에서, 지금은 전통과 새로운 가르침(행 17,19), 알려진 신들과 알지 못하는 신(행 17,23), 우상과 하나님의 충돌이 사도 바울과 아테네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행 17,29).
2. 사도행전이 전하는 당시의 아테네는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다신사회였고, 아테네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무엇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호기심이 많았던지, 그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행 17,21-22).
사도 바울은 한편으로는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했습니다. 바울이 토론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헬레니즘 시대(아리스토텔레스가 사망한 주전 322년에 시작하여,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족 출신의 마지막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한 주전 30년까지 지속된 시대)에 가장 중요한 철학 사조였고 그 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주전 341년-주전 271년)에 따르면, 우주는 보이지 않는 원자들, 즉 허공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현실세계는 이런 다양한 종류의 원자들 간에 발생하는 우연적인 충돌의 결과이지 어떤 정확한 목적을 가진 창조의 결과가 아닙니다. 일종의 유물론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사후의 삶을 믿지 않았고, 인간의 존재를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종류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육체의 소멸과 함께 파괴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세상이라는 근거 없는 곳에서 벌이나 상을 받을 생각을 한다는 것은 비이성적이라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무분별한 쾌락의 추구와 유물론을 지지했다고 흔히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 행복한 삶은 사치나 변덕을 모르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이들은 인생의 목적이 모든 고통의 제거에 있으며, 고통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연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 모든 욕망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이 대화했던 또 다른 철학은 에피쿠로스 철학에 정면으로 반대한 스토아 철학이었습니다. 스토아라는 말은 ‘폴리그노트’라는 벽화로 장식된 아테네의 ‘그림이 있는 회랑’(스토아 포이킬레)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기원전 4세기 말경에 키프로스 출신의 제논(주전 335년경-주전 263년경)이 이곳에 학교를 세운 것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이성적 원리로서의 ‘로고스’를 탐구했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셨다’고 주장한 요한도 스토아 철학과 대화한 것처럼 보입니다(요 1,1). 스토아 철학자들은 영혼을 기체에 가까운 물질로 이해했는데, 공기와 불이 혼합된 형태의 실체로 보고, 이를 프네우마(pneuma)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프네우마’를 ‘공기와 불의 혼합’이 아니라, ‘영’으로 이해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이 프네우마는 온 우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창조 원리로서, 이것이 일으키는 충돌의 힘에 따라, 자연이 네 등급으로 나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우주의 만물은 주기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불에서 탄생하고 불 속에서 분해됩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유한한 동시에 영원한데, 우주가 유한한 것은 소멸할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이지만, 영원한 것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이 주기적으로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영원한 우주 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로고스)만이 할 수 있고, 이성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코스모스),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 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라고 합니다. 스토아 철학은 우주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시간 속에서 발생했고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끝없는 세계로 이해합니다. 자연 속의 사물들은 공기, 물, 흙, 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요소는 불입니다. 불은 물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생동하는 신적 원리, 즉 로고스(logos)로서 세계의 모든 존재 속에 스며있는 세계의 영혼입니다. 그 자체로 완전하고 영원하며 질서정연한 물질적인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이성은 곧 신(神)이라고도 불립니다.
3. 바울 당시, 바울이 대화 혹은 대결해야 했던 주요 철학사조는 바로 에피쿠로스 철학과 후기 스토아 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주의는 거의 모든 차원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과 극단적으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물의 근원을 원자로 환원하는 유물론적인 세계관, 특히 영혼과 육체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것,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교는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바울 후에도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신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별히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론’은 고대교회의 신학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주 만물 안에 로고스가 내재하고 있으며, 신과 인간이 로고스를 공유하고 있다는 범신론적 주장은 사도 바울과 요한에게 낯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과 요한에게 로고스는 코스모스의 질서와 조화의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육신이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요 1,14). 우주는 창조되었다는 주장에서는 일치하지만(행 17,24; 요 1,3),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또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행 17,25). 하나님은 ‘로고스’, ‘보편적 이성’, ‘세계영혼’, ‘프네우마’, ‘제1원인’ 등 그 어떤 개념으로도 온전히 규정되고 파악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이용하여 사도 바울이 그가 믿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관념으로 만들어낸 어떤 특정 개념에도 갇히지 않으시며, 인간이 손으로 만든 어떤 특정 공간에도 가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과 같은 영이셔서, 우리가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 3,8).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분’이십니다(행 17,27). ‘더듬어 찾는다’는 말은 인간이 어둠 속에 있어서 아직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자명한 일이 아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요 14,17)고 말합니다. 이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세상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원인 혹은 이유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다고 해서, 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맞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결단의 문제이자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분, 구하면 주시고, 두드리면 열어주시는 분(마 7,7),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행 17,27). 바울 당대의 시인들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행 17,28).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신적 본질(로고스)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음’은 ‘존재의 유비’가 아니라, ‘관계의 유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친밀함을 뜻하는 것이지요.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로마인이건, 자유인이건 노예이건, 남자이건 여자이건, 어른이건 어린이건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지만, 2 천 년 전, 다신 사회이자 계급사회였고, 문명인과 야만인이 명백하게 분리된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실로 혁명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당시의 세상은 계급과 신분, 자유인과 노예, 성, 신(神)들의 수만큼이나 여러 층으로 분리되고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인간의 급진적 평등을 가능하게 하고, 다신사회는 계급과 계층의 분리, 배제와 차별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뿐임을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종교인과 무신론자,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 백인과 유색인종,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지라도, 모두 하나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받아서 지키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요 14,20-21). 계명은 단순히 도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연합 가운데 행하는 삶의 모든 길을 함축합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인식 행위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 계명을 받아 지키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저자는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으니, 세상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벧전 3,14).
4.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40년이 지나면서, 정권도 여러 차례 바뀌고 민주화도 이루어졌지만, 지금까지 진상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진상은커녕,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명칭도 통일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한국사회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보는 시각과 입장의 차이로 분열되어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광주사태’라고 하고, 다른 누구는 ‘광주민중항쟁’, ‘광주 5.18-27민중학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합니다. 헬기 총격을 보았다는 목격자 증언과 전일빌딩에 탄흔도 남아 있는데, 총을 쏜 사람은 없다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일이지요. 남파간첩 ‘광수’라고 지목당한 사람이 자신은 간첩이 아니라고 신분을 밝혀도, 그는 계속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또한 해괴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민간인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93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남기고 막을 내린지 40년, 한 세대도 넘었지만, 아직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현재진행형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고, 미국 정부의 비밀이 해제된 문건이 일부 공개되었지만,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진실이 밝혀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언젠가 분명히 모든 진상이 규명되고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에 격동과 격변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일제식민지배,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4,19혁명, 5,16군사 쿠테타, 부마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 모든 사건들이 어제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광주민주화운동도 역사가 되겠지요. 그러나 세상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있지만, 양심의 법정, 하나님의 심판은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진상을 밝히는 것은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첫 걸음입니다. 그 다음에 죄의 고백과 용서, 명예회복(배상과 보상), 역사 기억하기가 함께 진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역사적 출발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돌이켜보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해자도 피해자도, 명령받은 군인도 학살당한 시민도, 광주 안에 있던 사람들도 광주 밖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모순으로 가득 찬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희생자, 누구도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결코 면제될 수 없는, 같은 민족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고 증언합니다(행전 17,28). 가해자든 피해자든, 목격자든 방관자든, 하나님 안에서는 배제와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듬어 찾기만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길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행 17,30-31).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사도 바울이 한 증언입니다.
세상의 법정은 공소시효가 있고, 양심의 법정도 인간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회개를 통해서 피할 수 있고, 회개와 함께 부활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누구도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회개한 사람은 이미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40년’을 맞은 올 해를 ‘주님의 은혜의 해’로 만드는 길, 그 길은 우리 민족의 집단적 회개에 있습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
497 | 2025-06-29 |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 임영섭 목사 |
496 | 2025-06-22 |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 임영섭 목사 |
495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 임영섭 목사 |
494 | 2025-06-08 | 성령강림주일 | 하나님 안에서 | 임영섭 목사 |
493 | 2025-06-01 | 부활절 일곱째 주일 | 하나님의 의 | 임영섭 목사 |
492 | 2025-05-25 | 부활절 여섯째 주일 |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 임영섭 목사 |
491 | 2025-05-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하나님의 집 | 임영섭 목사 |
490 | 2025-05-11 | 부활절 넷째 주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 임영섭 목사 |
489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488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487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486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485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484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483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