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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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도행전 7:55-60/ 베드로전서 2:4-10/ 요한복음서 14:1-14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5-10 |
전주 | 하나님 말씀 안에 살게 하소서(D. Buxtehude) |
찬양1부 | 어머니의 넓은 사랑(구두회 곡) 특송: 안채연 교우, 조에스더 교우, 임건묵 교우, 김동연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님과 동행하는 가정(박혜주 곡) 특송: 이예랑 교우, 김유정 집사, 김호 집사,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하나님의 크신 사랑(J. Zundel) |
후주2부 | 하나님의 크신 사랑(J. Zundel) |
성경본문 |
사도행전 7:55-60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베드로전서 2:4-10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존재로서 여러분도 집 짓는 데 사용되어 신령한 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서 14:1-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두 달 이상을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확산사태가 조금씩 진정됨에 따라, 우리는 오늘 방역지침을 지키면서 조심스럽게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초유의 상황에서 비롯된 시련과 역경 속에서, 교회와 나라와 세계를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 인도하시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의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노약자 혹은 기저질환을 가진 어르신들인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오늘을 ‘어버이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로 목숨을 잃은 어르신들을 주님께서 품에 안아주시고, 부모님을 잃고 슬퍼하는 자녀들을 위로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다하지 못한 효 때문에 후회와 미안한 마음에 지금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녀들은 다른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여겨 존중과 감사의 마음으로 대함으로써, 그리고 부모 없이 자라는 어린이들의 부모가 되어줌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기를 기원합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 5,16).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딸린 첫 번째 명령입니다(엡 6,2-3).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니, 이 명령을 순종하는 이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약속입니다. 약속은 계약과 달리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 때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실패할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 지침에 따라 제한된 성도들만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께서 같은 은혜로 함께 하시어, 오늘의 예배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은사와 평화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빌립은 초기 복음서들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빌립은 공관복음서에서 제자 ‘열둘’의 명단에 한 번씩 언급될 뿐이고(막 3,13-19; 마 10,1-6, 눅 6,12-16), 그것도 일관되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에 이어 다섯 번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초기 복음서들 어디에서도 빌립에 대한 정보는 그의 이름 외에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빌립은 특별한 주목을 받지 않은 제자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빌립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빌립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 그의 형제인 시몬 베드로를 부르신 다음, 예수께서 세 번째로 부르신 제자입니다. 요한은 빌립이 벳새다 출신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나 ‘모세가 율법 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 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라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반문하고, 빌립은 그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요 1,43-46). 요한은 빌립과 안드레를 다른 사람을 제자의 길로 인도하여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청하는 선교사로 그린 것입니다.
그 후, 빌립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갈릴리 바다의 동쪽 광야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빌립을 시험하려고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실 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빌립은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요 6,5-7)라고 말합니다. 빌립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성격의 인물로 보입니다.
빌립은 그 후, 예수께서 배반당하실 것을 예고하신 후,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시자,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고 말하면서 등장합니다(요 14,7-8).
빌립은 여전히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어쩌면 그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등을 보여주신 하나님(출 33,18-23), 그리고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려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태우고 도랑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말려 버리고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죽인 엘리야에게 나타나신(왕상 18,37-39) 하나님의 대현현을 회고했을지 모릅니다.
3. 그러나 ‘이제’부터(요 14,7) 모든 것이 변화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제자들은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환상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사람들의 대변자 역할을 한 것이지요. 빌립의 이 질문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제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신비한 현현이나 환상들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여기서 ‘안다’는 동사는 ‘인정하다’는 의미를 지닌 고대 근동의 계약적 언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인정됩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하나님을 보기 위해 신적 현현에 수반되는 놀라운 기적이나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4,10).
우리는 보냄을 받은 사람은 그를 보낸 자를 온전히 대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는 대사는 그를 보낸 나라의 대통령과 국가를 대변하듯이, 특정한 왕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은 자는 곧 그를 보낸 왕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냄을 받은 아들은 그를 보낸 아버지를 대변하니, 아들을 본 사람은 사실상 아버지를 본 것이지요. 보냄을 받는 자는 그를 보낸 자를 온전히 대변한다는 것이 유대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보냄을 받은 자와 보낸 자의 법률적 관계를 본질상의 유사함의 관계로 심화시켰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 14,10)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이제 보냄을 받은 아들과 보내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냄을 받는 제자들과 보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확대합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그들을 보내신 분, 곧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할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요 14,12).
보냄을 받은 사람은 그를 보낸 분을 온전히 대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傳道)고 선교(宣敎)이지요. 그리스도인은 그가 믿고 그를 보내신 분이 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하기는커녕, 정 반대되는 일을 하는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이 전도와 선교의 걸림돌이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신천지’가 문제되더니, 얼마 전에는 신앙훈련이라며 신도들에게 인분을 먹인 ‘빛과 진리 교회’(서울동대문소재)라는 교회도 있다니, 아! 참으로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 같은 교회로 보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역겹습니다. 이 정도로 무식하고 광적인 집단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21세기에도 있다는 것이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유감스럽지만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고 수준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가 얼마나 큰 심판을 받고 지옥 밑바닥까지 내려갈지 두렵습니다.
4. 우리는 기도를 마칠 때, 언제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맺습니다. 이런 기도의 전통은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의 말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 14,13).
유대인들은 기도 중에 자주 족장들의 이름을 상기시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상기하는 거룩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감동하실 것을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 것도 동일한 태도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들의 이름을 상기함으로써 아버지를 감동시키기 위한 것보다는, 기도드리는 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기도한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이신 아들을 힘입어 우리의 간구가 응답될 것임을 확신한다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하나 됨’은 ‘능력의 공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과 ‘하나 됨’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과 같은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요 14,12). 다시 말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요 17,1-5), 즉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시며(요 20,21-23),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보혜사 성령을 주시면(요 16,7-8), 제자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대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죄를 용서하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는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하나이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분의 능력을 공유하여 주님께서 하신 일을 대변하겠다는 결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사소한 문제들에 관한 간구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도 드립니다. 그런 기도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고, 또 모든 기도가 응답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응답받는 기도도 있어서, 우리의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4,13).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어지는 기도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기도라는 말입니다(요 14,13). 아무 기도나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이 아니지요. 복권을 당첨시켜달라는 기도는 내 이름으로 드리는, 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이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동안에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던 일들이 계속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일들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시는 분이시고(요 1,14),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에서 삶이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증언합니다. 요한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경이로운 표적들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요 2,11),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40), 아버지께서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신 표적(요 17,4)이 그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요 17,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야 할 기도라는 것이지요.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역사상 유래가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구분될 정도로 우리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지구적 차원에서 집단적 죽음과 생명 사이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만은 아닙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연계된 경제위기의 쓰나미는 상상하기조차 두렵습니다. 각자도생하다가 모두가 함께 죽든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 각자희생하든지,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쳐야 할 기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려지는 곳, 어디에서나, 생명을 살리는 일과 함께 생명을 파괴하는 악마적 세력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신 아들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힘입어, 우리는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지라도, 마침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요 16,33).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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