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자기 백성을 고발하시는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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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미가서 6:1-2/ 고린도전서 1:18-25/ 마태복음서 5:1-12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2-02 |
전주 | 주여,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J. A. Guilain) |
찬양1부 | 만입이 내게 있으면(R. J. Hughes)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내 너를 지키리(M. P. Murphy)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 하나님, 그 거룩하신 이름 늘 높이네(Leoni) |
후주2부 | 주 하나님, 그 거룩하신 이름 늘 높이네(Leoni) |
성경본문 |
미가서 6:1-2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소송 내용을 샅샅이 밝혀라. 산과 언덕이 네 말을 듣게 하여라. 너희 산들아, 땅을 받치고 있는 견고한 기둥들아, 나 주가 상세히 밝히는 고발을 들어 보아라. 나 주의 고소에 귀를 기울여라. 나 주가 내 백성을 상대하여서, 고소를 제기하였다. 내가 내 백성을 고발하고자 한다. 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마태복음서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
솔로몬(주전 961-922) 사후, 비록 한 나라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분열되었고,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때로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두 왕국이 정치적 자결권을 상실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8세기부터 상황이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앗시리아가 본격적인 제국 건설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주변 약소민족들은 추풍낙엽처럼 흔들렸습니다. 앗시리아가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땅을 탐낸 것은 한편으로는 그 땅의 귀한 목재와 광물자원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땅이 이집트, 소아시아의 서남부, 지중해로 통하는 길목이기 때문입니다.
앗시리아를 제국의 반열에 올린 왕은 티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였습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면서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사작전은 단지 공물을 모으기 위한 원정이 아니라, 영속적인 정복사업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선왕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토착 군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반란을 무자비한 복수로 응징하는 대신에,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영토를 병합하여 제국의 속주로 삼는 정책을 취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왕 2세가(주전 786-746) 죽은 후, 10년 안에 왕이 다섯 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치적 안정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위는 세 번이나 역모와 암살로 바뀌었고, 누구도 왕권찬탈을 정당화할만한 합법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는 단지 6개월의 통치(주전 746-745) 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라는 사람에게 암살당했고(주전 745, 왕하 15,8-10), 이 살룸도 한 달 뒤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주전 745-737)에 의해 살해되는 등(왕하 15,14), 잇따른 정변은 나라 전체를 참혹한 내란으로 몰아넣었습니다(왕하 15,16). 므나헴의 잔혹한 내란을 열왕기 역사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 때에 므나헴은 디르사에서부터 진격해 와서, 딥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쳐죽이고, 사방 모든 곳을 공격하였다. 그들이 그에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고 하여, 그는 그 곳을 치고,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갈라 죽이기까지 하였다.’(왕하 15,16).
불안정한 정권을 앗시리아 제국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침으로써 유지하려고 했던 므나헴 왕은 자진해서 나라의 독립을 포기했고, 모든 지주에게 부과된 인두세를 통해 조공을 조달했습니다. 불만을 품은 애국적 이스라엘 사람들은 므나헴의 뒤를 이은 아들 브가히야(주전 737-736)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군관인 르말랴의 아들 베가(주전 736-732)를 부추겨, 브가히야를 암살했고, 왕권을 빼앗은 베가는 반앗시리아 연합세력을 구축해 저항했습니다.
반앗시리아 주전론자(主戰論者)였던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과 연합전선을 만들면서, 당시 웃시야의 아들 요담(주전 742-735)이 통치하던 형제국인 남 왕국 유다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은 이를 거절합니다. 비록 형제국이고 중립국이기는 하지만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세력인 남 왕국 유다를 남쪽에 남겨두고, 북쪽에 있는 앗시리아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북 왕국 이스라엘 연합국은 먼저 유다를 침입, 예루살렘을 봉쇄했습니다. 형제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왕좌가 위태하다고 판단한 남 왕국 유다의 왕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셀 왕에게 원조를 요청, 그렇지 않아도 북 왕국 이스라엘을 치려고 생각하고 있던 앗시리아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호소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엄청난 선물을 보내면서 앗시리아의 도움을 애걸했고(왕하 16,7이하), 주전 733년 티글랏빌레셀은 병력을 총동원, 갈릴리와 요단 동편 지역의 모든 이스라엘 영토를 유린했습니다. 상당수의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영토의 아주 일부만 앗시리아의 봉신으로 통치하게 된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주전 732-724)에게 남겨졌습니다.
그런데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앗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셀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가 왕위에 오른 틈새를 타, 이집트와 비밀리에 교섭을 하면서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각축하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를 도울 여력도 없었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돕지도 안했습니다. 마침내 주전 724년,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가 공격해왔습니다. 2년 이상을 버티기는 했지만, 사마리아 도성은 주전 722년이나 721년의 늦여름 또는 가을에 함락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로 끌려갔고, 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결국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앗시리아의 침략이 결정적이었지만, 이스라엘은 내부의 끊임없는 권력투쟁, 음모와 암살에 의한 빈번한 왕권교체, 지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 때문에 결국 붕괴된 것입니다. 나라가 분열되고, 법과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백성은 이교 신앙과 우상숭배에 빠져 방탕하고, 이기적 야만성이 극에 달한 이런 시대를 예언자 호세아와 아모스는 충격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남 왕국 유다는 이스라엘의 반앗시리아 연합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덕분에, 재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앗시리아의 원조를 간청했을 때, 이미 유다도 앗시리아의 봉신국가가 된 것입니다. 남 왕국 유다는 형제국인 북 왕국 이스라엘과의 군사적 대결 때문에, 자진해서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던 것이지요.
바로 이런 시기, 곧 유다의 왕 요담(주전 742-735)과 아하스(주전 735-715)와 히스기야(주전 715-687)가 대를 이어 가면서 통치하던 시기에 모레셋 출신의 예언자 미가가 등장합니다. 자기 나라의 형제국, 한 때는 한 나라였던 북 왕국 이스라엘이 왜, 그리고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남 왕국 유다에서 목격한 미가는,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며, 남 왕국 유다 또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경우,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형제국 북 왕국 사마리아의 상처가 고칠 수 없는 병이 되고, 그 불치병이 유다에 전염되어, 기어이 예루살렘 성문에까지 이르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통곡하고, 맨발로 벌거벗고 다니면서, 여우처럼 구슬피 울며, 타조처럼 목 놓아 울면서(미 1,8-9) 통곡합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날이 새자마자 음모를 꾸며,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듭니다(미 2,1-2).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지도자들은 자기 백성을 산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냅니다.’(미 3,1-3). 그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힙니다(미 3,11). 그들은 입에 먹을 것을 물려주면 평화를 외치지만,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합니다.(미 3,5).
백성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사람 하나도 남지 않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뿐입니다(미 7,2). 가짜 되, 틀리는 저울과 추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쟁이들이었습니다(미 6,10-12). 탐욕스러운 관리, 돈에 매수된 재판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자들, 모두 서로 공모관계로 얽혀있었습니다(미 7,3).
예루살렘 서남방, 유다 고지와 지중해 중간에 있는 세펠라의 농업지대인 모레셋 출신이었던 예언자 미가는 부자들과 지주들, 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농민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경멸받고 치욕을 당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이스라엘이 지은 죄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미 6,13).
그러나 그를 슬프게 한 것은 자기 민족의 현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자기 백성을 스스로 고발하시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너희 산들아, 땅을 받치고 있는 견고한 기둥들아, 나 주가 상세히 밝히는 고발을 들어 보아라. 나 주의 고소에 귀를 기울여라. 나 주가 내 백성을 상대하여서, 고소를 제기하였다. 내가 내 백성을 고발하고자 한다.’(미 6,2).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을 고발하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지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 백성의 도덕적 타락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언자 미가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백성을 죽이고서 그 위에 세운 시온, 죄악으로 터를 닦고 세운 예루살렘이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미 3,10).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기고 재물에 혈안이 되었으면서도, 하나같이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니,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는 자기 최면적 믿음이었습니다. 미가는 이것을 미신이나 사교라고 칭하지 않고 죄라고 불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한 지도자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종으로 여겼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발하셨고,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시온이 밭 갈 듯 뒤엎어질 것이고,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는 미가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미 3,12).
그러나 하나님의 고발은 고발 그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미가를 통해, 자기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행군하면서 겪은 일들을 회상시키십니다(미 6,3-5). 그것은 자기가 구원한 자기 백성을 스스로 고발해야 하는 하나님의 찢어지는 심정의 반영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고발은 심판하고 징벌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자기 백성이 파국과 멸망의 길로 들었으나, 예언자 미가는 그래도 이 백성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주님의 소유임을 회상시키면서(미 7,14),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호소합니다(미 7,18-19). 모든 가치가 무너져 내려,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투는 현실, 자기 집안사람이 원수가 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가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립니다(미 7,6-7).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 진노하시되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계시지는 않는 주님, 기꺼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모든 죄를 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던지시는 주님께서(미 7,18-19)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미 5,5). 그리고 이 평화는 이스라엘 안에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평화는 민족들 사이의 분쟁과 열강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고,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는 온 세계적 평화로 이어집니다(미 4,3).
예언자 미가가 본 평화는 단지 자기 나라 안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나라만의 평화가 아니라, 온 누리의 평화를 위해 일하도록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어느 예언자도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자기 나라가 있지만, 예언자는 언제나 자기 공동체의 가치를 넘어 보편적 가치의 비전을, 자기 나라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의 우주적 평화에 대한 비전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주류 가치, 지배적인 세계관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 그가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받고, 추방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 예언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도(마 5,1-12)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지배적인 가치와 세계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을 리 없지요. 온유한 사람은 악착스럽지 못해 가진 땅마저 빼앗기는 세상이니 복 있다고 할 수 없지요. 독립투사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을 보면, 의에 주렸다고 배가 부르기는커녕, 오히려 더 못사는 세상이니,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기뻐하는 사람은 정신이 정상이 아니거나 성인(聖人)이겠지요. 자비를 베풀다가 뒤통수 맞아본 사람은 자비한 사람이 복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사기꾼이나 거짓말쟁이의 속내를 읽어내지 못해 사기를 당하기 일쑤이니 복 있는 사람이라고는 못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약속되었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은 선행에 대한 지상에서의 보상과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늘나라를 주시고, 그들을 위로해주시고, 자비롭게 대하시고,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시기에 그들이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설령 지상에서는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 없을지라도, 하늘에서 주실 큰 상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고 슬퍼할지라도, 모욕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제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보상과 대가를 눈에 보이게 주셨더라면, 예수님은 결코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도 했지요(요 6,15).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무능하고,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무식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증언한 사도 바울, 그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었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 24-25).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사실 바이러스 질환은 새로운 사실도, 놀라운 사실도 아닙니다. 서양 중세의 흑사병에서부터(유럽인구의 3분의 1이 희생), 1918년 발병한 스페인 독감(세계적으로 5000만 명 이상이 희생), 1968년의 홍콩 독감(100만 명 이상 사망), 2002년 사스(중증 급성호흡기 증후군), 2012년 ‘메르스’(중동 호흡기 증후군),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 등은 많은 사망자를 냈지만, 그래도 인류는 매번 슬기롭게 위기를 넘겨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1월 31일부터 2월1일까지 전세기로 귀국하는 수 백 여명의 교민들을 2주 동안 격리시켜야 하는데, 격리지역으로 발표된 지역(아산과 진천) 주민들이 트랙터로 길을 막고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심지어는 현지를 방문한 장관에게 계란을 던지면서, 정부가 우리를 버렸다고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물론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격리되어야 하는 교민이나 그 가족은 물론, 그들이나 환자들을 돕고 치료하는 승무원들과 봉사자들, 의료진과 공직자들의 헌신과 고통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지요. 아니 우리 가운데 누구도 감염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 수 없지요. 굳이 민족애를 들먹이지 않아도,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진다면 그렇게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한 아산 시민이 페이스북에 ‘We are Asan(우리가 아산이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많이 힘드셨죠? 아산에서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라고 적힌 팻말 사진과 함께 환영 손 피켓 릴레이에 동참하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게 된 것은, 역시 우리나라 사람은 다르다는 감동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 안에는 여전히 특정 국가, 특정 문화, 특정 인종, 특종 성별, 특정 집단, 특정 계층, 특정 연령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온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017년 강서구 장애인 특수학교 서울 서진학교에 다니는 장애인 어린이들 부모가 무릎을 꿇고 호소했지만, 서진학교는 아직도 문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민원으로 여러 차례 공사가 지연된 탓입니다. 아니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장애 어린이를 둔 부모가 법적으로 보장된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 같은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고 호소해야 한단 말입니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이용하는 문화복합시설 ‘어울림 플라자’는 주민 반대로 착공도 못했다고 합니다. 2018년 기준 보건복지부 등록 장애인은 259만 명, 인구의 5%가 공인된 장애인이지만, 그들은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귀화한 국가대표 농구선수 라건아(31·전주 KCC)씨는 14일 인스타그램에 자신에게 온 개인 메시지를 캡처해 게재했습니다. ‘한국에서 꺼져라’는 등 비난과 라건아 가족을 향한 심한 욕설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라건아 선수가 ‘고맙다’고 무시하자 ‘깜둥이(nigger)’라고 비아냥댔습니다. 외국인, 특히 흑인에 대한 이런 인종주의적 혐오와 언어폭력은 아직 우리 사회가 갈 길이 멀다는 한숨만 나오게 합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는 아파트도 브랜드별로 차별받고, 주거 형태로 사람들을 혐오하고 배제합니다. 월(세)거지, 전(세)거지, 빌(라)거지, 휴(먼시아)거지.....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돈다고 합니다. 대학은 물론, 초, 중, 고교, 아예 유치원과 동네 학원, 아니 산부인과 병원까지 등급을 나누며 자신과 다른 집단을 ‘수준낮다’ 비웃고, ‘물을 흐린다’고 배제하는 나라가 이 지구 위에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종 코로라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사회 깊은 곳까지 뿌리내린 혐오와 배제와 차별이라는 사회적 바이러스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적 바이러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고발하셨듯이, 우리를 고발하실 것입니다. 그 때는 원고가 하나님, 피고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이스라엘의 파멸로 끝났지요. 그러나 우리 시대의 원고(原告)는 사회적 바이러스, 피고(被告)는 대한민국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우리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파국으로 치닫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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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487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486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485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484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483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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