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제목 |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 |
|---|---|
| 성경구절 | 스바냐서 3:14-18/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서 3:10-18 |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 예배일 | 2018-12-16 |
| 전주 | 오소서, 온 인류의 구세주여(J. S. Bach) |
| 찬양1부 | 주의 영광(G. F. Händel) |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 찬양2부 | 그 맑고 환한 밤중에(R. S. Willis) |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 후주1부 | 오랫동안 기다리던(R. H. Prichard) |
| 후주2부 |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G. M. Martin) |
| 성경본문 |
스바냐서 3:14-18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빌립보서 4:4-7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3:10-18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
1. 예언자 스바냐는 자신과 자신의 활동 시기를 처음부터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바냐는 자신의 아버지는 구시이고, 할아버지는 그달리야이고, 그 윗대는 아마랴이고, 그 윗대는 히스기야라고 소개합니다(습 1,1). 예언자들이 4대까지 거슬러 올라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인데, 스바냐가 굳이 4대 조상까지 소개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 ‘구시’(Kuschi)가 에디오피아식 이름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의 할아버지들의 이름들, 그달리야, 아마랴, 히스기야 등 모두 ‘야훼’ 하나님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는데, 유독 아버지 이름이 에디오피아식 이름이어서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지요.
스바냐의 아버지 이름이 에디오피아식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주전 8세기 말과 7세기 초, 이집트와 군사적, 외교적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에 대항하려고 했던 유다의 히스기야 왕(주전 725년-679년)이 팔레스티나에 에디오피아 출신의 외교관과 상인, 용병 등을 정착시켰고, 정착한 에디오피아인들과 유다인들이 혼인을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스바냐는 족보 외에 더 이상 자신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고 있어서, 우리는 그가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언자의 신탁과 선포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의 출신이나 혈통이 아니라 그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귀족이든 평민이든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자를 예언자로 불러 쓰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바냐가 예루살렘 성의 지리에 밝고,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부패상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예루살렘 출신의 성전 예언자로서, 거만하고 믿을 수 없는 다른 직업적 예언자들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는 부패한 제사장들에게 저주와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였으리라고 추정합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보호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예언자 스바냐는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 때에 활동했다고 합니다. 요시야는 유다의 16번째 왕으로서, 8살에 즉위하여 기원전 640년부터 609년까지 31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왕하 22,1).
유다 왕 요시야의 선조 히스기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을 보았고, 멸망 원인이 지도층과 백성의 우상숭배에 있다고 판단, 유다 왕국 내부에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우상들을 제거하고 이방종교들의 관습을 폐기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했습니다.(왕하 18,4-6). 그러나 히스기야 왕의 개혁은 그의 아들 므낫세의 즉위와 함께 수포로 돌아갑니다. 열두 살에 즉위한 므낫세(Manasse, 주전 697년-642년)는 비교적 긴 기간 통치했는데, 특별히 그의 통치기에 가나안 종교, 아람 종교, 앗시리아 종교와의 혼합주의가 왕실에까지 깊이 퍼질 정도로 심각했습니다(왕하 21,1-9). 므낫세의 이런 혼합주의적 종교정책과 권력정치가 어느 정도 유다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가져와 거국적인 건축도 가능했던 것처럼 보입니다(습 1,10-11, 12-13). 왕실과 백성의 우상숭배는 므낫세를 이어 스물두 살에 왕위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아몬 시대에도 유지되었는데(왕하 21,19-26), 아몬은 겨우 두 해 동안 통치하다가 정적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왕하 21,23).
아몬을 이어 개혁군주 요시야가 8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기원전 640년경)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전 622년, 요시아 왕이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까지, 유다 왕국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시기, 스바냐의 표현에 따르면, 유다 백성이 주님을 등지고 돌아서, 주님을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으면서(습 1,6) 가나안 사람들의 농경신인 ‘바알’이나, 앗시리아의 종교인 달과 별, 암몬 사람들의 신 ‘밀곰’을 섬겨(습 1,4-5), 우상숭배가 그 절정에 달했고, 한 편으로는 주님에게 맹세하고 주님을 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밀곰을 두고 맹세하는 등(습 1,5), 종교적 혼합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스바냐가 활동했던 것입니다.
사실 종교혼합은 모든 역사적 종교의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야훼신앙도 시대마다 고대 근동의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지난 2천년동안 그리스도교도 다른 종교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해왔습니다. 19세기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신학적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전한 기독교가 샤머니즘과 도교 등 한국의 토착종교적 전통과 만나 독특한 한국기독교를 형성하게 된 것이지요. 새벽기도, 성경문자주의 등이 그 유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혼합이 혼합주의가 되어, 한 종교의 정체성 자체가 혼란에 빠지거나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이방종교를 들여오고 이방신을 숭배한 데는 나름대로 주변 강대국들과의 정치, 군사, 외교를 비롯한 경제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동맹 없이 국가의 존립이 위태했기 때문에, 동맹국의 종교를 수용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전쟁에 패하면 조공을 바쳐야 할 나라의 신을 숭배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요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우상숭배는 유다의 조상신이었던 야훼 하나님은 물론, 그들의 조상과 그들의 역사까지 부인하는 행위였습니다.
우상숭배의 근원에는 불안과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상은 눈에 보이지만 야훼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상은 지금 여기에서의 다산과 풍요를 약속하는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하십니다.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고, 믿을 수 없어서 불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과 약속에 대한 불안이 싹트는 곳에서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런데 유다의 주변국 상황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가나안에 정착할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혔던 블레셋 사람들은 여전히 군사적, 정치적 위협세력이었지만,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습니다.(습 2,4-9). 이집트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에티오피아는 주전 663년, 앗시리아에 의해 이집트 수도 테베가 점령당하면서 종말을 맞았습니다.(습 2,12). 그런데 ‘한껏 으스대던 성, 안전하게 살 수 있다던 성,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하면서 속으로 뽐내던 성,’(습 2,15),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성은 주전 612년에 파괴되었고, 앗시리아 제국은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주변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새로운 제국의 침략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유다 지도층은 시대의 변화를 읽어낼 능력도, 나라를 구할 의지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망하고야 말 도성, 반역하는 도성, 더러운 도성, 억압이나 일삼는 도성’이 되었고(습 3,1), 그 안에 사는 지도층들은 ‘주님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주님의 충고도 듣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습 3,1).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재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고,’ ‘예언자들은 거만하며, 믿을 수 없었고, 제사장들은 성소나 더럽히며 율법을 범했습니다.’(습 3,4).
그래서 예언자 스바냐는 심판과 저주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심판의 날은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 전쟁의 함성이 터지는 날, 견고한 성읍이 무너지는 날, 죄를 지은 자들의 피가 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오물처럼 널리는 날(습 1,15-17), 땅에서 사람의 씨가 마르는 날(습 1,2)입니다.
그러나 저주와 심판은 유다 민족에게만 향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주변 나라들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블레셋의 다섯 도시국가들, 모압은 소돔처럼 되고, 암몬 자손은 고모라처럼 될 것이며, 거친 풀이 우거지고, 둘레가 온통 소금 구덩이로 변할 것입니다(습 2,4-9). 에티오피아도,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도 황무지와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습 2,13).
하나님은 단지 유다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과 이웃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고,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를 남겨두십니다. ‘이스라엘의 남은자들’,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들’(습 2,3),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습 3,12)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남겨두는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겸손(謙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겸손할 ‘겸’(謙)은 ‘공손하다’, ‘덜다’, ‘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겸손할 ‘손’(遜)은 ‘몸을 낮추다’, ‘순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이란 ‘자기 마음을 비우고, 몸을 낮추어, 순종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겸손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어근인 ‘아나’도 ‘괴로움을 겪다’, ‘낮추어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겸손과 관련된 히브리어 동사, ‘카나’는 ‘자신을 복종시키다’, ‘샤펠’은 ‘낮아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우리 말 ‘겸손’과 대체로 비슷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 특히 지혜문학에서 ‘겸손한 사람’(아니)은 대부분 복수형인 ‘아나임’으로 사용되고 있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비천한, 억압받고 낮아진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단지 마음의 태도나 공손한 몸짓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가진 것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고, 미래가 불확실하니 하나님 밖에 의지할 이가 없으니 자기를 낮출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난하면서 교만한 사람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한 부자를 보기는 더 어렵지요. 한국사회 재벌 자녀들의 온갖 횡포와 상상을 뛰어넘는 ‘갑질’ 문화가 그 증거입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다 교만한 것은 아니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다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존경받는 부자들도 많이 있고, 가난 때문에 병적인 욕망과 증오로 가득 찬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돈이건 권력이건 많이 가진 사람들이 겸손하기는, 가난하면서 교만한 것보다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돕고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도 겸손한 사람들이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왕자였다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민수기 12,3)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뒤에 오시는 더 능력 있는 분을 준비하는 다만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자신을 이해했습니다(눅 3,4).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터이니, 자신은 그의 신발 끈도 풀 수 없다고 자신을 낮춘 것이지요(눅 3,16).
사도 바울도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사람,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기는 사람’(빌 3,5-8)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옥살이도 하고, 매도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유대인들에게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고,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며,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지만’(고후 11,22-27), 그는 항상 기뻐하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직 기도와 간구로 아뢴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빌 4,4-6).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아무 것도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기뻐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빌 4,7)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 영어성경은 ‘사람의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surpasses all understanding)으로, 마틴 루터는 ‘모든 이성보다 더 높은’(hoeher ist als alle Vernunft)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의 모든 염려하는 계산과 합리적인 예측을 능가하는 평화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평화는 어떤 평화이고, 그 평화는 어떻게 성취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모든 이해와 이성을 능가하는 더 높은 평화라는 말일까요?
3. 평화가 ‘전쟁’의 반개개념으로 이해될 때, 평화는 ‘일어난 전쟁과 일어날 전쟁 사이에 무기가 침묵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 평화는 오직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 특별히 ‘군사력과 경제력’에 의해 보장된 평화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평화는 로마 제국의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였고, 지금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를 주장했고, 그에 걸맞게 2019 회계연도(2018년 10월-2019년 9월) 예산 총 4조 4,000억 달러(약 4815조원) 가운데, 국방 예산을 전년 대비 13% 늘린 총 6,860억 달러(약 744조원)를 책정했습니다. 우리나라의 2018년 예산이 428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미국의 국방 예산이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두 배에 가까운 것이고, 우리나라의 올해 국방 예산(43조원)과 비교하면 17배 수준입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 2016년 기준, 미국은 국방비로 6,110억 달러를 지출하여 세계 1위의 지위를 차지했는데, 그것은 중국, 러시아, 사우디 등 나머지 2위에서 9위까지를 합한 국방비(5,950억 달러)보다 많은 액수입니다.
평화는 비쌉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2019년 우리나라 국방예산은 46조 6971억 원으로 전년 대비 8,2% 증액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2019년 예산총액 469조 6천억 원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서라도, 평화가 유지되고,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한 나라의 평화가 오직 군사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에서도 배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국방비를 지불하지만, 정작 미국 내부에서 평화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테러와 인종갈등, 마약, 총기살인 등 엄청난 사회적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2015년, 미국에서 4만 건에 달하는 총격사건으로 13,000여명이 숨지고, 25,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망자 가운데 어린이는 756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하루 평균 36명이 총기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꼴입니다. 2005년부터 2015년 사이 미국에서 테러로 죽은 사람은 71명인데, 같은 기간에 총기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30만 1천 797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지난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아프카니스탄에서 사망한 미군은 약 2400여명, 2003년부터 2018년까지 이라크에서 사망한 미군은 약 4500여명으로 모두 7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국은 국내에서 총기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숫자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군인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입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 나라가 전쟁상태에 있다는 것은 한 해 동안 죽는 사람이 천 명을 넘을 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지난 2015년 한국에서 안전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은 2만 8천 명 정도였습니다. 며칠 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24살의 젊은 하청노동자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6년 희망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수는 13,092명이었습니다. 이는 하루 평균 36명이, 40분마다 1명이 자살한 것을 의미합니다. 1년에 천명 이상이 죽으면 전쟁상태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4. 평화는 밖에 있는 적으로부터만 위협받는 것이 아닙니다. 전장에서 죽는 군인보다, 국내에서 총기폭력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다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군인들보다, 자살하거나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 수가 더 많다면,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평화이고, 무엇이 평화를 진실로 위협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평화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의 이성이나 이해, 사람의 계산과 예측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현실주의자에게 그런 주장은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힘의 균형 혹은 힘의 우월함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무시하는 혹은 무식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망한 것은 군사력이나 동맹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동맹국은 언제든지 자국의 이익에 따라 변했고, 같은 백성이었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사이의 동맹관계도 권력다툼으로 힘없이 파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들 틈새에서 외교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전쟁 또는 화친, 왕실결혼과 조공, 심지어는 이방신 숭배를 통해 외교를 했지만, 지도층인사들의 부정과 부패,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르는 백성들의 불신앙과 역사 건망증이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사실 한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예측은 빗나가기 일 수인 것이 인간적 삶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약속, 곧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 하나님만이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하신 주님이시라는 믿음만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를 주십니다.
그러나 평화는 오직 힘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믿는 이들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불리시는 분이 왜 강대국의 왕실에서 왕자로 태어나지 않고, 베들레헴 작은 촌마을, 말구유에 맨 몸으로 누워있는 아기로 오셨는지. 평화의 왕으로 숭배 받는 분이 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셨는지.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희생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를 성취하셨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평화(pax Domini)는 사람의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방식으로,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평화로 실현된다는 것을 믿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들’입니다.
|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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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4 | 2026-03-15 | 사순절 넷째 주일 | 하늘을 보는 자 | 임영섭 목사 |
| 533 | 2026-03-08 | 사순절 셋째 주일 | 그 사람 속에 있는 샘물 | 임영섭 목사 |
| 532 | 2026-03-01 | 사순절 둘째 주일 | 거듭난 사람의 시선 | 임영섭 목사 |
| 531 | 2026-02-22 | 사순절 첫째 주일 | 변명과 타협이 없는 광야 | 임영섭 목사 |
| 530 | 2026-02-15 | 주현절 여섯째 주일 | 새출발의 종교 | 임영섭 목사 |
| 529 | 2026-02-08 | 주현절 다섯째 주일 | 은은한 빛, 맛있는 소금 | 임영섭 목사 |
| 528 | 2026-02-01 | 주현절 넷째 주일 |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 | 임영섭 목사 |
| 527 | 2026-01-25 | 주현절 셋째 주일 | 바울의 이름 | 임영섭 목사 |
| 526 | 2026-01-18 | 주현절 둘째 주일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 임영섭 목사 |
| 525 | 2026-01-11 | 주현절 첫째 주일 | 거부할 수 없는 사랑 | 강승구 목사 |
| 524 | 2026-01-04 | 성탄절 둘째 주일 / 신년주일 | 마음을 드높이십시오 | 임영섭 목사 |
| 523 | 2025-12-28 | 성탄절 첫째 주일 / 송년주일 | 우리 삶의 이집트 | 임영섭 목사 |
| 522 | 2025-12-21 | 대림절 넷째 주일 | 조금 더 의롭고, 조금 더 사랑하고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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