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여덟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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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엇갈린 손의 축복
성경구절 창세기 48:8-14, 17-20/ 고린도전서 1:26-31/ 요한복음서 12:24-26
설교자 배영호목사
예배일 2018-10-21
전주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셨다(D. Buxtehude)
찬양1부 만민아 주 찬양해(F. Mendelssohn)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찬양2부 주 나의 능력(W. H. Monk)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온 천하 만물아, 주를 찬양하여라(Kirchengesangen)
후주2부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D. Cherwien)
성경본문 창세기 48:8-14, 17-20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면서 물었다. "이 아이들이 누구냐?"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이 아이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자식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말하였다. "아이들을 나에게로 가까이 데리고 오너라. 내가 아이들에게 축복하겠다." 이스라엘은 나이가 많았으므로,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볼 수 없었다. 요셉이 두 아들을 아버지에게로 이끌고 가니, 야곱이 그들에게 입을 맞추고 끌어안았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은, 내가 너의 자식들까지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구나." 요셉은 이스라엘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이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그런 다음에 요셉은 두 아이를 데려다가, 오른손으로 에브라임을 이끌어서 이스라엘의 왼쪽에 서게 하고, 왼손으로 므낫세를 이끌어서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서게 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에브라임이 작은 아들인데도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므낫세는 맏아들인데도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었다. 야곱이 그의 팔을 엇갈리게 내민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은 것을 보고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고,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거절하면서 대답하였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가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아우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갈라져 나올 것이다." 그 날,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할 것이니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다.

고린도전서 1:26-31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2:24-2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구약성서 맨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 인물이라면 야곱과 요셉입니다. 야곱은 창세기 25장부터 등장하여 맨 마지막 50장까지 이야기 되고 있으니 무려 창세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 다음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의 이야기로 창세기 37장부터 시작해서 역시 맨 마지막 50장까지 이야기 되고 있으니 14장에 이릅니다. 그 다음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12장입니다. 그렇게 보면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그의 손자인 야곱 그리고 아브라함의 증손자요 야곱의 아들인 요셉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인 이삭, 또 아브라함의 손자인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아브라함의 증손자요 야곱의 아들인 요셉 이들의 관계는 단지 혈통에 의한 혈연의 관계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전승, 믿음의 계보라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아들인 이삭에게 전승되고 또 그의 손자인 야곱에게 전승되고 또 증손자인 요셉에게 이어져 감으로써 그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 믿음은 언제나 그들의 일상을 지배했고,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했으며, 집단을 이루는 동기가 되었고, 그들이 맞닥트린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고, 축복을 약속 하시며 이들의 믿음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펼쳐 나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참 아름답고 복 받은 믿음의 가문이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의 가문과 집안도 다름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전승이 자녀에서 자녀로 또 그 자녀 손으로 이루어지는 은혜가 바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길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야곱이 죽기 직전 그의 아들인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게는 손자이지요. 그런데 그 축복의 장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편애가 오히려 요셉에게는 다른 형제들에게 미움과 시기를 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자기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내려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스무 냥(20냥)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때 요셉은 17살 이었고 아버지 야곱은 110세였습니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요셉을 아버지 야곱은 낯선 땅 이집트에서 만납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야곱은 그의 나머지 아들과 식솔들을 데리고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아들 요셉을 만나 목 놓아 울면서 기쁨으로 재회합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의 안내로 이집트 왕을 만나는데 이집트 왕 바로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당신 나이가 얼마입니까?” 그러자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 이다.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 야곱이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년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제가 누린 햇수는 조상의 연조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라는 이 야곱의 말속에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생각 속에는 후회와 아쉬움도 있고, 슬픔과 아픔도 있고, 보람과 기쁨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낙심과 절망될 때도 있었고 행복했던 때도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 험악한 인생살이 130년을 살아온 야곱이었지만 그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야곱의 생애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 땅으로 도망가는 길, 노숙하며 잠자던 그 야곱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야곱의 130년 생애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신 그 약속을 단 한 번도 폐기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지켜주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그 삶의 내용과 떠안은 삶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이 될 때 죽은 줄로만 알고 지냈던 아들 요셉을 20년 만에 기쁨으로 만나 재회하는 야곱 또는 요셉과 같은 역전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코스모폴리탄적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130세에 식구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온 야곱은 이집트의 총리인 아들 요셉 덕분에 그야말로 안락한 노후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말년에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의 다른 형제들과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에서 가장 비옥한 땅 고센 땅에 정착하여 목축으로 삶을 일구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야곱의 나이가 나이니 만큼 무슨 일이 닥칠 것인지 예감하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혼자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요셉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갑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이 이집트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인 아스낫을 통해 얻은 아들입니다. 방안에 들어온 요셉과 두 손자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던 야곱은 ‘가까이 오라’ 손짓한 다음 그들을 한 번씩 안아준 다음에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요셉은 오른손에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왼손에 큰 아들 므낫세를 잡고 침상에 있는 야곱에게 다가갑니다. 그대로 가면 반대로 야곱의 오른편에 큰 아들 므낫세가, 왼편에는 에브라임이 서게 됩니다. 그 모습대로 야곱이 축복해 주기를 바라며 요셉은 야곱에게 절 한 다음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큰 아들 곧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아버지 야곱이 오른 손을 얹고 축복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신명기법전에 의하면 장자 곧 맏아들은 그 아래의 동생들 보다 아버지의 상속을 두 배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신 21:17). 또 출애굽기에 의하면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간주합니다(출 13:12). 모든 처음 난 것은 하나님께서 피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장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권리요 특권입니다. 야곱은 대표적으로 그 장자의 축복을 사모하며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얼마 안 되는 팥죽으로 거래하여 샀고, 또 형에게 주는 아버지의 축복을 눈속임으로 가로챘습니다. 이토록 야곱은 장자의 권리와 특권에 욕심을 품었고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참으로 엄숙한 순간입니다. 바로 이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야곱이 오른손과 왼손을 엇갈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오른손을 작은 손자인 에브라임에게 얹고, 왼손을 큰 손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축복하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권리와 특권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가 되도록 축복하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요셉이 얼른 다가가서 아버지 야곱의 엇갈린 손을 제자리에 돌려놓아 야곱의 오른손을 큰 아들인 므낫세의 머리에, 그리고 왼손을 작은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 야곱이 말합니다. “요셉아,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하며 야곱은 자신이 뜻 한대로 요셉의 작은 아들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고, 요셉의 큰 아들인 므낫세의 머리에 왼손을 얹은 다음 “므낫세가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아우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갈라져 나올 것이다.” 하고 축복합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의 이 엇갈린 손, 이 엇갈린 손의 축복 그것은 야곱의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해프닝일까요? 아니면 눈이 어두워 앞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야곱의 노안 탓일까요? 아니면 야곱의 고집인가요?
아닙니다. 아버지 야곱의 손이 엇갈린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가 야곱의 손을 제자리로 바꾸어 놓으려는 요셉에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라고 말하는 야곱을 보면 아직 그의 정신은 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수도 아니고 우연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 나름대로 뜻이 있고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야곱의 의도된 행동 그 동기가 무엇일까요? 요셉의 작은 아들인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큰 아들인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는 야곱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야곱은 그 아버지 이삭의 작은 아들입니다. 에브라임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작은 아들입니다. 야곱과 에브라임은 작은 아들 곧 차자라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죽음을 앞둔 야곱이 자신의 자녀들 중 가장 사랑했던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주려는 이 순간 야곱은 자신의 생을 돌아봅니다. 그러면서 순간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인생은 끊임없이 양지를 쫓는 인생이었습니다.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쫒아 꽃을 피듯이 자신의 인생은 늘 그렇게 태양을 쫒아가는 해바라기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양지를 쫒는 그의 노력과 애씀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그래서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챘고 장자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해 20년 동안 무임금으로 일 하면서 삼촌 라반에게 속고 또 속이면서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한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겨루며 엉덩이뼈가 부러진 것도 사실은 형 에서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줄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함 그 불안에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처절한 몸싸움이었습니다. 형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하게 되자 야곱은 목적지를 바꿔 숙곳 세겜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자신의 필요와 이익을 중시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딸 디나의 사건으로 세겜 땅 사람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음이 왔을 때 야곱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곳 벧엘로 올라갑니다. 야곱의 이 벧엘 행(行)을 그의 신앙회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세겜 부족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다른 주변 부족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고 그들로부터 당할 보복과 고립이 두려워서 벧엘로 올라간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 곳에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장사지내고 요셉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20년 후 요셉을 만나고 이집트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17년을 이집트 땅에서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야곱의 인생은 한마디로 손해 볼 줄 모르는 인생이었습니다. 손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빼앗으면 빼앗았지 뺏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자신의 기억 속에 지나가면서 야곱은 생각합니다. 아하! 내 인생은 하나님의 엇갈린 손의 축복이었구나. 내가 한 가문을 이루고 많은 재산을 모으고 말년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나고 이렇게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내 노력, 내 머리, 내 의지, 내 힘의 결과요, 그 결과가 오늘의 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아니었어. 하나님께서 내 형 에서와 나를 엇갈려 축복하신 결과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순간의 차이로 둘째가 되어야 했던 내 인생이어서 나는 악착같이 빼앗고, 가로채고, 내 것으로 만들고,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앞세우고, 사람 등 뒤에 숨고, 속이고 속는 그런 삶의 결과가 오늘의 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보살핌과 축복이 작은 아들인 나 야곱에게 주어졌던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둘째, 차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첫째, 곧 장자의 신분과 권리를 누리기 위해 그토록 수고하고 애썼던 야곱을 야곱 되게 한 것은 야곱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달아 안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 개입하신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인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지난 날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을 사죄하는 심정으로 또 작은 아들인 자신에게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제 므낫세 대신 요셉의 작은 아들인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비는 것입니다. 야곱의 자기투영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 사람들의 노력과 행위와 의지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부여받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들의 행위와는 별개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축복은 결코 어떤 인간적인 조건과 자격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축복은 어떤 권리나 자격을 가진 자에게 기계적으로 결정론적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자격과 권리를 전혀 갖지 못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의 권리와 자격이 아니라 또 나의 수고와 나의 노력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먼저 내게 베풀어 주셨음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 머리에 오른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내가 지금 이처럼 누리고 있음을 알고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욱 그 손에 힘을 주어 축복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양지를 찾고 태양을 쫒아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듯이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보다는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찾아주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지만 말없이 묵묵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그 축복, 그 믿음의 전승이 오늘 성도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그 자녀 손들에게 이르기까지 영원토록 전승되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장자입니까? 아니면 차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차자로써 장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차자로써 약하고, 지혜롭지 못하며, 어리석고,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택하셔서 강하고, 지혜로우며, 담대하며, 또 넉넉한 장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왜 입니까? 오직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며,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믿음과 고백이 성도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에 늘 함께 있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9세기 구한말 조용한 아침의 나라인 이 땅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1885년 미 북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와 미 북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라 목사가 우리나라에 내한한 공식 선교사 입니다. 하지만 이들 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이미 이 땅에는 조선인 청년들에 의해 복음이 받아들여졌고 조선인에 의해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청년 이응찬, 백홍준 등은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맥킨타이어 목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동료인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세례를 받은 후 길을 떠나 황해도 장연에 ‘소래’(松川)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사가인 백낙준 박사는 이 소래교회를 “한국 개신교회의 요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래교회가 세워진지 10년 쯤 뒤인 1893년 이 교회에 캐나다 출신의 존 맥킨지(William J. Mckengie, 1861~1895) 선교사가 들어와 살면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맥킨지는 캐나다가 파송한 공식 선교사가 아닙니다. 그냥 조선이 좋아서 조선에 개인자격으로 들어온 32살의 젊은 청년 선교사입니다.
맥킨지는 “토착민에게 전도하려면 토착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초가지붕의 토담집에서 조선 민중들의 옷차림으로 똑같이 먹고 마시며 우리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번은 서울에 살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인 릴리아스 홀톤(L. Horton) 여사가 성탄절에 빵, 케이크, 우유, 설탕 등을 맥켄지에게 보내 왔습니다. 그러나 맥켄지는 그 음식을 한번 입에 대면 다시는 조선 밥을 먹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하나도 취하지 않고 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맥킨지의 진심을 확인했고, 그의 인격과 삶을 통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맥킨지는 허물어져가는 초가지붕의 소래교회를 다시 짓는 일에 앞장서서 마을사람들과 같이 손수 흙 지게를 지고 벽돌을 나르면서 마을 언덕 위 햇빛 잘 드는 곳에 아담한 기와지붕의 한옥 예배당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렇게 소래교회를 다시 지어 하나님께 봉헌 한 후 일 주일 뒤 그는 죽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영양실조에 풍토병이었습니다. 낯선 환경과 문화, 낯선 사람들과의 생활이 어려웠을 겁니다. 게다가 그 시대 우리 조선은 외국인 선교사가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생활여건입니다. 조선음식이 그에게 맞을 리 없고, 잠자리가 편안할 리가 없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그를 힘들게 했을 겁니다. 그 모든 불편함과 어려움을 오직 하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선교적 사명으로 지탱했지만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맥킨지 선교사는 죽어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 땅 황해도 소래교회 옆에 묻혔습니다. 이 소식이 본국 캐나다 선교국에 알려졌고 이 때 부터 캐나다는 우리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1897년 10월 마침내 조선 선교를 정식으로 결의하였습니다. 그 이후 캐나다는 우리나라의 함경도지방과 북간도 지역을 선교지로 삼아 복음을 전하였고, 후에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태동시키고 이끌어 오신 수많은 선각자들이 캐나다 선교사들과 만나게 됨으로써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왔던 것입니다. 정말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성도 여러분!
맥킨지 선교사는 이 땅에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이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고 거두어들여지고 또 흩어져 씨앗이 되고, 뿌리가 내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과 복음의 열정이, 사람에 대한 사랑과 뭇 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전이 시간과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때에서 지금으로 또 지금에서 앞으로, 우리 믿음의 조상들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로부터 우리들 자녀 손들에게 이르기 까지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그렇게 전승되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 경동교회와 성도 여러분 모두도 그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따라 왔고, 따르고 있으며, 또 따라 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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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예배일 절기 설교제목 설교자
1341 2026-04-05 부활주일    다시 사는 것과 새로 사는 것 임영섭 목사
1340 2026-03-29 종려주일    두 번째 기도 임영섭 목사
1339 2026-03-22 사순절 다섯째 주일    밖으로 부름받은 사람들 임영섭 목사
1338 2026-03-15 사순절 넷째 주일    하늘을 보는 자 임영섭 목사
1337 2026-03-08 사순절 셋째 주일    그 사람 속에 있는 샘물 임영섭 목사
1336 2026-03-01 사순절 둘째 주일    거듭난 사람의 시선 임영섭 목사
1335 2026-02-22 사순절 첫째 주일    변명과 타협이 없는 광야 임영섭 목사
1334 2026-02-15 주현절 여섯째 주일    새출발의 종교 임영섭 목사
1333 2026-02-08 주현절 다섯째 주일    은은한 빛, 맛있는 소금 임영섭 목사
1332 2026-02-01 주현절 넷째 주일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 임영섭 목사
1331 2026-01-25 주현절 셋째 주일    바울의 이름 임영섭 목사
1330 2026-01-18 주현절 둘째 주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임영섭 목사
1329 2026-01-11 주현절 첫째 주일    거부할 수 없는 사랑 강승구 목사
1328 2026-01-04 성탄절 둘째 주일 / 신년주일    마음을 드높이십시오 임영섭 목사
1327 2025-12-28 성탄절 첫째 주일 / 송년주일    우리 삶의 이집트 임영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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