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다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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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
성경구절 예레미야서 1:4-10/ 고린도전서 13:1-7/ 누가복음서 4:21-3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2-03
전주 사랑의 주여, 우리 여기 있나이다(J. S. Bach)
찬양1부 오 찬송 드리세(Hans Leo Hassler)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내가 천사의 말한다 해도(J. M. Stevens)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 음성 외에는 참 기쁨 없도다(R. Lowry)
후주2부 영광의 왕께 다 찬양하라(J. M. Haydn)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1:4-10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고린도전서 13:1-7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누가복음서 4:21-3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1.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눅 4,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기존의 것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소외된 ‘아웃사이더’, 자기 조국에 대하여 비판적이어서 박해를 받는 지성인, 혹은 추방당한 정치적 망명객에 의해 익히 인용되곤 합니다.

 

동학의 ‘최제우’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일본의 천황 암살을 음모한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박열’을 사랑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이 두 사람의 변호는 물론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맡다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감옥살이까지 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독일 고백교회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그런 인물이었지요. 우리는 ‘양심의 역사’에서 ‘역사의 양심’으로 기억되는 기라성 같은 그런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였습니다. 주전 627년 유다 왕 요시야의 재위 제13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는 자기 조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패망하는 것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포위된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젖먹이들이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 것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도 한 술 떠주는 이가 없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4,4). 굶주림으로 서서히 죽어가던 사람들은 제 손으로 자식들을 삶아서 먹어야 했습니다.(예레미야애가 2,10; 4,10). 성이 함락된 후,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목전에서 자기 아들들과 유다의 귀족들이 모두 처형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 두 눈을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왕하 25,7: 렘 39,6-8; 52,9-11).

 

자기 백성에게 내릴 재앙과 조국의 패망을 예언하면서 모든 사람과 맞서는 예언자를 어느 통치자나 백성이 좋아하겠습니까!(렘 26,11-12). 그러나 예레미야는 입을 열어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쳤기에’(렘 20,8),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고’(렘 20,8),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렘 20,17-18).

 

그러나 모든 예언자들이 자기 백성과 맞서고, 그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길을 가는 권력자와 백성에 맞서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혔지만(미가서 3,11), 그것도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었습니다(렘 1,14).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렘 23,25), 입에 먹을 것을 물려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하는 예언자(미가서 3,5)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통치자들과 자기 백성들에 맞서 심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뭇 민족과 나라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고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렘 1,10). 그것이 주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선택하고,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운’ 이유였습니다(렘 1,5).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선포가 자기 백성과 통치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선언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보내시든지 그에게 가야 했고, 무슨 명령을 내리시든지 그대로 말해야 했습니다.(렘 1,7). 그래서 그는 마침내 고문당한 후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고(렘 37,15), 물웅덩이에 갇혀 굶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렘 38,6). 백성과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예언자, 하여 ‘눈물의 예언자’로 불린 예레미야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습니다(예레미야애가 1,16; 2,11; 3,48).

 

 

2. 예수님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이셨지요.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 가운데 61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찾아 읽으신 후,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 4,21)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누가는 이런 반응이 감탄과 놀라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지만, 누가의 병행말씀인 마가와 마태복음은 나사렛 사람들의 태도가 한결같이 적대감에 찬 것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막 6,2-3; 마 13,55-57).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번역된 헬라어, ‘에스칸달리존토’(eskandalizonto)는 ‘꺼려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 단어를 ‘화나다, 비위가 상하다’(aergern sich)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불쾌해 했고’, 급기야 ‘화가 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적대감은 모멸로 발전합니다. 명문 율법학교를 나온 랍비도 아닌 목수, 같은 동네에서 살아 그 집 숟가락 수까지 잘 알고 있는 목수의 아들 예수가 그런 지혜와 기적을 보여주는 것에 화가 났던 것이지요.

사람들이 격분한 것은 다만 예수님의 출신배경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6장에 배치함으로써, 이 사건 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고(막 1,21-28), 나병환자(막 1,40-45)와 중풍병 환자를 치료하시면서(막 2,1-12), 이미 율법학자들과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선언만이 아니라, 그의 기적 행위가 그들 율법학자들과 유대 지도층 인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격분시켰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을 더욱 격분시킨 것은 단지 예수님의 기적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분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이미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척 이유도 제시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 보내셨고(왕상 7,8-17), 또 엘리사를 통하여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는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왕하 5장)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거부했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들을 받아드려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이지요.

 

이제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말은 같은 동네에서 함께 성장한 목수의 아들이 갑자기 예언자로 자처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매우 용의주도한 모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격분한 군중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한 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고 합니다.(눅 4,28-30).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을 어떻게 극복하실 수 있었을까요? 살기등등한 위협 속에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한 가운데를 어떻게 당당하게 빠져나오실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 예레미야는 어떻게 그 한없는 외로움과 깊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3.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마침내 성이 무너지고, 약탈과 학살이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 말도 잘 못하고 아직 너무 어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렘 1,7-8).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주겠다’(렘 1,8)는 주님의 약속만이 예레미야를 절망적인 외로움과 끝이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자기 고향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추방당한 예언자, 모든 기존의 것들에 저항하여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면서 다르게 사는 아웃사이더는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이들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고전 13,6)으로 자기 고향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역본(시리아, 아랍어 역)에 의하면, ‘불의를 즐거워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진리가 이길 때 즐거워하는 사랑’으로 번역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만이 개인주의, 가족주의, 집단이기주의, 눈먼 애국주의, 폐쇄적 민족주의, 나아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개인적(individual)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적(私的/private)인 것은 아닙니다. ‘individual’은 ‘in-divisible’ 곧 ‘나누어질 수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나뉘어질 수 없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결코 ‘private’한 것은 아닙니다. ‘private’는 라전어 ‘privatus’에서 유래했는데, ‘빼앗다, 박탈하다, 따로 떼어내다, 소유물’을 의미했습니다. 사랑은 빼앗은 소유물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나뉘어질 수 없는 결합을 의미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빼앗은 소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private 한 사랑이 어떻게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천민 개인주의, 가족주의, 집단이기주의, 눈먼 애국주의, 폐쇄적 민족주의로 나가는지 역사에서 충분히 보았습니다.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 그것이고, ‘스카이 캐슬’의 대물림이 그것이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주의가 그것이고, 일제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1923년)과 난징 대학살(1937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부터 보스니아에서의 제노사이드(인종청소, 1990년대), 미얀마의 로힝야 학살(1978년부터 시작)이 그것이고, 빨갱이에 대한 증오와 이른바 색깔론이 그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난민 혐오가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도 어처구니없게도 가족사랑, 나라사랑, 민족사랑, 종교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이, 자기 나라가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진리로 불의를 뽑고 허물고, 멸망시키며 파괴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심는 것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에서 낯선 이방인이 되고, 그래서 자기 조국에서 박해받고 추방을 받는 아웃사이더가 되지만, 이들의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 자아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게 합니다. 이런 사랑이 집단이기주의에서 대타협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사랑이 눈먼 애국주의와 폐쇄적 민족주의로 선동된 전쟁을 막고 희생자들과의 화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사랑이 인간중심주의에서 생태중심주의로의 방향전환을 가능하게 합니다.

 

요한1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 4,18). 그러므로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오늘의 예언자들,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맞서 세상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아웃사이더들은, 자신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그 분의 완전한 사랑을 힘입어, 외로움과 두려움을 함께 이겨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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