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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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
성경구절 열왕기하 5:9-14 / 갈라디아서 6:1-5, 8-10 / 누가복음서 10:1-11
설교자 강승구 목사
예배일 2022-06-26
전주 신실하신 주여 우리를 붙드소서(D. Buxtehude)
찬양1부 주 찬양해 오 내 영혼(M. M. Ippolitof-Ivanof)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 안에서 기뻐하여라(F. Schubert)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W. G. Cooper)
후주2부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W. G. Cooper)
성경본문 열왕기하 5:9-14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섰다.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것 아닌가? 우리 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하고 불평하였다. 그렇게 불평을 하고 나서, 나아만은 발길을 돌이켜, 분을 참지못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에게 가까이 와서 말하였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 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 대로, 요단 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다.

갈라디아서 6:1-5, 8-10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누가복음서 10:1-11
이 일이 있은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일흔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것과 같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내릴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너희는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자기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아라.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리고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그러나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 거리로 나가서 말하기를, ‘우리 발에 묻은 너희 고을의 먼지를 너희에게 떨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라’ 하여라.”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인 열왕기하 5장은 한 인물의 이름과 직위, 그의 평판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건강상태에 대한 다섯 가지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군대장관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크고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한 나라의 왕이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 시리아가 전쟁에서 승리를 했는데 그 모든 업적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라고 소개하며 이 사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겉으론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 사람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어 메초라는 악성 피부병을 의미합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그의 이름은 공정한’, ‘정중한이라는 뜻을 가진 나아만입니다.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 잡아온 어린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이 작은 소녀가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라면 어른의 병을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고 말합니다. 그 예언자는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였습니다. 그는 스승이 했던 사역의 대부분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적의 통로가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 4장에는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편을 잃은 한 여인과 두 아들을 채무에서 구해준 이야기와 수넴 마을의 부유한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린 이야기, 음식에 든 독을 없애고 그것을 생명의 국으로 변화시킨 이야기, 백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보리 빵 스무덩이와 햇곡식을 가지고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기적 이야기를 통해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갑니다. 엘리사의 이런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가 한 이야기를 통해,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 문 앞까지 오게 됩니다.

 

엘리사의 처방전은 간단했습니다.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다.’ 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성경과 개역개정을 보면 오늘 새번역성경과 달리 한 가지를 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당신의 살이 그러면 그가 회복될 것이다 즉,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회복될 것이고 깨끗하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처방전을 받고 화를 내는 나아만에게 그의 부하들이 나와 이야기합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 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대로,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다시 회복되었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구약의 말씀이 전하는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 모습으로 다...... 깨끗해진 나아만의 그 피부를 바라보며 어린 손주들과 자녀들의 찹쌀떡 같이 뽀얗고 부드러운 살결을 상상하는 우리의 시선은 2절의 어린 소녀에게로 옮겨집니다.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잡혀온 전쟁의 포로가 된 어린 소녀. 이 아이는 큰 인물이고 강한 용사이자, 존경받는 사람인 나아만과 대조되는 지극히 작은, 어린 소녀였습니다.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던 나아만에 비해 세상적으로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시중드는 노예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기에 하나쯤 부족한 것이 있어도 되잖아하고 그냥 넘길 수 있었던 나아만을 바라보며,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라면 어른의 병을 고칠 수 있겠노라라고 확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녀의 그 작은 마음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시는 참된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평화하면 우리는 어렵지않게 샬롬을 떠올리게 됩니다. 샬롬은 한글 성경에서 평화, 평안, 화평, 평강, 안녕 등 여러가지 의미로,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이레네, 텔레이오스 등으로 번역합니다. 샬롬은 샬렘에서 파생했는데 완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가는 움직임을 이야기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출애굽기 2136절에서 자신의 소가 다른 소를 받아 죽이게 된 경우 반드시 살아 있는 소로 배상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 배상, 갚다에 샬렘이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샬롬, 평화입니다.

 

열왕기하 5장 전체에 걸쳐 이어지는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나아만, 나아만의 아내,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 나아만의 부하들, 그리고 엘리사와 사환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 병이 낫게 된 나아만도 아니요, 다섯 번 째 기적 이야기를 이어가는 엘리사도 아니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요, 그저 어리고 작고 연약하고 힘이없는 누군가의 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지만, 그 마음에 온전한 회복,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로 등장하는 어린 소녀와 나아만의 부하들이 숨은 주인공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서의 말씀도 주님께서 꿈 꾸셨던 이스라엘의 샬롬, 에이레네, 평화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 누가복음서는 사복음서 저자 중에 유일하게 일흔 명의 선교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보냄받은 사람들이 일흔 명이냐, 일흔 두 명이냐 어느 쪽이 맞느냐를 놓고 학자들이 설왕설래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쪽이 맞느냐의 문제보다 우리 앞에 더 중요한 물음은 말씀을 한 예수나 기록한 누가가 왜 그 숫자를 택했는가입니다. 그것은 누가가 예수를 모세와 견주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 일흔 명을 뽑는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공유한 그들은 모세를 도와 새로운 시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준비를 갖추었던 민수기1116절과 25절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그랬던것처럼,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정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며 당신과 함께 오늘 새로운 출애굽을 이끌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첫 번째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항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추가로 일흔명의 장로가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에서도, 그 시대 사람들 가운데 치유의 사역과, 힘 있고 날카로운 가르침을 통해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한 길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의 중심에는 평화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 평화의 사람들이 있는가를 살피면서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해야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대가 해묵은 숙적 사마리아인이든 아니면 두려워하면서도 증오하는 로마든, 평화라면 사절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자기편으로 끌어와 원수들을 일거에 제거해버리는 전면전을 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반대 방향을 향해갑니다. 악을 악으로 맞선다는 생각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일흔명은 오늘 이스라엘을 파멸로 치닫는 데서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평화의 길을 수용하는 마지막 기회를 제시하는 전달자로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당신의 백성과 온 세상을 사랑과 새 창조로 감싸기를 갈망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구원하는 통치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는 악의 세력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있을 마지막 전투에 임하기 위해 자기의 길을 가시면서, 신비한 목적이 이미 성취되고 있음을 아십니다. 그 중심에는 새 백성의 창조가 있습니다. 새 이스라엘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합니다.

 

평화는 좋은 것이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인데, ‘평화를 빕니다.’ 외치며 걷는 그 걸음이 어째서 어린양이 이리 가운데를 가는 것 같은 위험한 길이고, 샬롬을 이루며 사는 삶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의 힌트를 갈라디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1-16절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사도바울은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에 에이레네, 평화, 회복의 역사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새롭게 창조되는 것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바로 율법이라는 관습과 전통에 매여 겉모양만을 꾸미는 삶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에 의지하며 그것을 유일한 자랑으로 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땐 내가 죽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삶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시는 참 된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내가 져야할 십자가, 우리 교회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평화를 이루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우리는 기쁨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잠시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로 살았던 장군의 하인들과 포로로 잡혀온 소녀를 기억해봅니다. 작은 소녀가 어떻게 나아만 장군 안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때, 그곳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 온 적이 있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 어린 소녀의 부모는 어디에 있으며, 언니나 오빠가 있었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같은 처지로 어딘가에 포로로 끌려갔거나 혹은 죽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 형제, 자매와 이별해야만 했던 그 어린 소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상처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자신에게 큰 아픔을 준 사람의 집에서 여종의 삶을 살아야했던 그 어린 소녀의 뻥 뚫린 마음에서 어떤 꿈과 희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소녀의 인생에 어떤 기쁨과 즐거움,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린 소녀는 아픔과 상처 가운데서도 자신이 이스라엘에 있을 때 보고 들었던 하나님의 경험, 엘리사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숱한 기적을 통한 회복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평화를 바라는 사람으로 설 수 있었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의 평화의 사도로 떠나는 사람들은 결단코 말로만 평화를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헌신과 희생, 때로는 반대자들의 조롱과 멸시 비웃음이 가득한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도 이 길은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로 가는 길과 같은 길이라고 하셨을까요. 평화를 바라며 사는 삶이 결단코 쉽지 않은 길임을 주님께서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의 길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고 걸었던 그들의 남긴 흔적을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꿈구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아가 자기 몫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서로의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가는 삶 위에 새롭게 창조되는 평화의 길이 열릴 것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론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마음에 낙심이 생기겠지만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분명 거두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아만을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시며 샬롬을 허락하신 분은 치유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모든 과정이 평화를 바라는 어린 소녀와 그 하인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 복종시켰던, 평화를 빌며, 노래하는 사람들의 믿음의 걸음을 통해 주님께서 주신 평화가 확장되어 갔음을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각자의 짐을 지고 서로의 짐을 져 주며 십자가 사랑을 나누는 삶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평화의 나라가 도래함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평화를 말하는 사람도 많고, 평화를 말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도 많고, 평화를 바라는 교회도 많습니다.

평화를 노래하는 사람도 많고, 평화를 노래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그 십자가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평화를 말하고 노래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교회가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 후 셋째주일을 보내며

길고 길었던 코로나19 라는 터널 안에서 밝아오는 한 줌 빛을 바라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새 예루살렘의 희망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사야서66:13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어미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평화를 바라며 사는 사람들의 삶, 예수의 십자가를 가슴에 새기며 평화를 이루어 가는 삶은 결코 순탄한 길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좌절과 실망을 통해 절망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어오셨고, 평화를 바라는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믿으며 끝까지 주님 앞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로 바로 서는 한 주의 삶을 살아야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한 주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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