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예수를 닮아가는 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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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도행전 16:16-26 / 요한계시록 22:12-20 / 요한복음서 17:20-26 |
설교자 | 임영섭 목사 |
예배일 | 2022-05-29 |
전주 | 너희 영혼을 아름답게 하여라(J. S. Bach) |
찬양1부 | 나의 왕이신 하나님(W. R. Spence)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믿음의 길을 걸어가리라(F. Mendelssohn)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하나이다(L. Mason) |
후주2부 |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하나이다(L. Mason) |
성경본문 |
사도행전 16:16-26 어느 날 우리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종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다. 이 여자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 하고 외쳤다.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여기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 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 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 하였다. 간수는 이런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한밤쯤 되어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요한계시록 22:12-20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생명 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 시오!”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나는 이 책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책에 기록한 재앙들을 덧붙이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한 말씀에서 무엇을 없애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한 생명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서 그가 누릴 몫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요한복음서 17:20-26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예수를 닮아 가는 이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 17장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마지막으로 하셨던 고별기도입니다.
요한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얼마 동안 이 땅에 계셨지만, 부활하신 후에는 일반 사람들에게 행하신 특별한 기적이나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주로 도마나 베드로 같은 그동안 함께 사역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개인적인 당부나 기적을 베푸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죽음을 앞둔 모세가 신명기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고별설교를 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해주신 마지막 고별 기도, 마지막 중보의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마지막 기도에서 한 가지 강조하고 계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혼자 믿는 신앙,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함께 하나님을 믿는 것, 믿음과 사랑 안에서 우리가 서로 돕는 것, 바로 공동체의 신앙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기도에서,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갈 때, 그 모든 일은 자신의 생각으로 혼자 결정하고 혼자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가 떠나고 이 땅에 주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그리스도인들도, 나 혼자 예수 믿고 나 혼자 예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 안에서 그랬듯이,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돕고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계시록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 고난을 이겨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릴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제국의 박해를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나 혼자 예수를 믿으면 사실 박해를 받을 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나 혼자 집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린다면, 누가 그것을 알아차릴 위험도 없었고, 따라서 편안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혹시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함께 성만찬을 나누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고, 그렇게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함께 모여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교회공동체의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설령 죽음의 위협이 있더라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매주 이렇게 모여서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드리는 이 예배의 원형,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예배하며 나 홀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이는 것은, 자녀된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위기와 어려움은 단순히 교인이 줄고 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더 큰 위기는,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만, 화면으로 예배를 보는 것만으로는,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의식과 감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와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을 보면서, 왜 우리가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즉 사도 바울과 실라, 바나바와 주변의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왜 그렇게 했고,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읽다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 주변에 대단히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주변 동역자들과 맺었던 관계는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과는 매우 오랫동안 함께 사역을 했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과는 짧은 시기만 함께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장기간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는 에라스도, 마가, 디모데, 디도, 두기고같이 바울을 존경하면서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고 바울의 인도에 따라 복음을 선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볼로, 브리스길라, 그리고 아굴라처럼 바울과 동등하고 독립적인 관계에 있던 동역자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실라는 바울과 대등한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실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경은 그를 예언자로, 지도자로, 그리고 사도로 부를 정도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예수의 제자들과 형제들, 그리고 유대인들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안디옥교회도 이방인 선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실라는 예루살렘교회의 초기 멤버였고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바울보다 먼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초대교회에는 중요한 논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과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인도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안디옥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그리고 논의 끝에,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는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때 예루살렘교회에서 결정한 내용을 안디옥교회에 전달하고, 이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해석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때 선발된 사람이 바로 실라였습니다.
바로 이즈음에 바울과 실라는 서로 만나 알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신앙과 능력과 열정이 대단했던 이 실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얼마 후에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정통해 있었고, 로마시민권자였고, 뛰어난 학식을 갖고 있어서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었지만, 바울에게도 많은 약점과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먼저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잘하지 못했고 당시에 통용되던 헬라어도 뛰어나게 구사하지는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글은 잘 쓰지만 말은 잘하지 못해서,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면,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약점을 보완해주고 이방인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바로 헬라어에 능통했던 실라 때문이었습니다.
실라는 안디옥교회에 보낸 편지를 쓰고 해석하고 가르쳤을 뿐만이 아니라, 뛰어난 헬라어 문장력을 갖고 있어서 베드로를 도와서 베드로전서를 대신 써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실라가 바울에게 도움이 된 더 중요한 부분은,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바울에게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가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을 직접 듣거나, 예수의 활동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의 사도였던 실라는 예수의 구체적인 생애와 가르침을 직접 듣고 배우고 사람들에게 선포했기 때문에, 바울에게 예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고 가르쳐 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바울도 실라에게 없는 장점이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실라가 듣고 배우고 경험했던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에 관한 경험들을 신학적으로 잘 정리해서 설명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도움은 실라와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예수를 더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선포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것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 전도여행에서 겪은 일들을 알려줌으로써, 실라가 믿고 있던 예수에 대한 신앙을 더욱 깊게 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전에 교회를 개척했던 도시들을 함께 순회하면서, 실라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바울과 실라가 함께함으로써 서로 가장 도움이 되고 힘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닮아 가는 데 서로 노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재정적인 보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그 권리를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고, 실라도 바울과 뜻을 함께하며 밤낮으로 일하면서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바나바는 재산을 팔아서 헌신을 했고, 바울은 구제헌금을 모금하였으며, 실라도 이 일에 기꺼이 동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실라, 그리고 함께 동역한 사람들이 이러한 삶과 신앙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그렇게 살았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씀하듯이, 그들이 예수를 본받고 닮아 가기 위해 서로 도와가며 노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제자, 라는 말이나 제자를 만들다, 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는 우리 모두 예수를 닮아 가야 한다는 뜻에서 닮은 사람, 닮다, 모델, 모범, 이런 단어들만을 사용합니다.
바울과 실라와 초대교회 사람들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가난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랬던 이유는 바로 예수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은혜를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바울과 실라와 초대교회 사람들이, 매를 맞고 투옥되고 죽음을 불사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도, 바로 예수가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고난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예수를 본받고 닮아 가는 삶이, 자기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결코 예수를 혼자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이 예수를 혼자 믿었다면 그들은 투옥되지도 않았고 매를 맞지도 않았고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안에서 서로 하나되어 함께해야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고, 그렇게 함께해야 예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함께 고난을 감수하며 믿음을 지켰던 겁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는 얼마나 사도 바울 주변에 동역자들이 많았으면, 성경에서 바울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이름이 밝혀진 것만 100여 명에 달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기록한 바울 서신과, 실라가 기록한 베드로전서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울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주 사용했던 표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이, 그 길지 않은 베드로전서에서 3장 16절, 5장 10절, 그리고 5장 14절에서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만 열심히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에 참석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속에 나가 나 혼자라도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예수와 함께했던 사람들조차, 그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실라 없이는 바울이 바울이 될 수 없었고, 그것은 실라도, 바나바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과 믿음을 나누며, 서로 배우며, 그들의 삶과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고, 오늘 바울과 실라처럼 그것이 세상에 복음이 퍼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나 혼자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예수를 만난 경험이 다르고, 예수께 받은 은혜가 다르고, 예수를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다양합니다. 그 은혜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서로 돕고 나누고 함께할 때 더 풍성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어려운 코로나 시대를 보내고 있지만, 육신이 연약해져서 어쩔 수 없이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얼굴을 볼 수 없는 서로를 위해서 더 깊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을 드리면서 이 찬양을 떨어져 있는 경동의 가족들이 함께 부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 때에 전화 한 통이라도, 문자 하나라도, 서로 안부를 묻고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예수 안에서 예수를 서로 나누고 배우고 닮아 가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바울과 실라가 함께 드린 기도와 찬양이, 사슬을 끊어지게 하고 감옥 문을 열리게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리는 이 기도와 찬양이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기적이 될 줄로 믿습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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