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다리를 짓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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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도행전 11:16-26 / 요한계시록 21:1-6 / 요한복음서 13:31-35 |
설교자 | 임영섭 목사 |
예배일 | 2022-05-15 |
전주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J. S. Bach) |
찬양1부 | 오 사랑의 예수여 내게 머무소서(M. Vulpius)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여 내게 오소서(R. J. Gielas)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Leoni) |
후주2부 |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Leoni) |
성경본문 |
사도행전 11:16-26 “그 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고 말하였다.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을 하여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서,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요한계시록 21:1-6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요한복음서 13:31-35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
다리를 짓는 사람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당시 제자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의 반응은 기쁨과 놀라움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상당한 혼란과 갈등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 중에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 사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우리 앞에 나타난 저 예수가 진짜 사람인지, 아니면 유령 같은 존재인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부활 사상을 부정하던 사람들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도, 막상 부활하신 예수를 현실 속에서 만났을 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오늘 요한복음서 13장 33절에 나오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가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계시면서, 부활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하게 밝혀 주시면 좋겠는데, 예수는 잠시 동안만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을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며 교회공동체로 모이기 시작했지만, 예수의 부활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역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겪고 있던 이 모든 문제들을 단번에 불식시키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약속해 주셨던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예수의 부활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도 나오듯이, 예수께서는 부활 이전이나 부활 이후에 성령이 너희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고, 그 약속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부활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이들에게도 성령의 역사는 하나의 확실한 해답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사도행전에는 이 말씀처럼 성령이 가라고 하셔서 가고, 성령이 가지 말라고 하셔서 가지 않았다는, 이런 말씀들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부활의 영이 그들과 함께하심으로써, 그 인도하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밖에도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느냐 고민할 때에도,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듯이, 부활의 영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역사하셔서,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로마제국의 박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당할 때에도, 예수 부활의 영께서 도와주셔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처럼, 담대하게 박해에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십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를 사람들이 믿게 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만난 그 부활을 믿고 부활의 삶을 살게 해주신 예수의 영,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따른 초대교회의 모습 속에는,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중요한 특징이 하나 발견되는데, 이것은 오늘 부활절 다섯째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가 반드시 되새기고 실천해야 할 부활의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시대부터 하나님의 영이 누군가에게 임한다는 것은, 그 영이 임한 사람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고 큰 권위를 얻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1장을 보면, 출애굽 당시에 모세가 혼자 일하기 힘들어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칠십 명의 장로들을 세우라고 하시는데, 그 장로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설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누구에게나 쉽게 내리는 영이 아니라,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특별한 지도자를 세울 때, 그들에게 힘과 능력과, 사람들 앞에서 그 일에 합당한 권위를 세워주고자 임하던 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의 증인들로 구성된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을 때,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권위만 허락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였습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권위,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예수의 권위, 부활의 영으로서 초대교회의 모든 분열과 혼란을 잠재우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되게 하시고, 부활의 공동체를 이끄시는 성령의 권위.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위만 남게 됩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 드러난 초대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셨는데,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오히려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에서 베드로만큼 중요한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수제자였고, 마가복음서 16장을 보면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면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베드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이 부활의 기적을 알아야 하고, 그가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해라,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게다가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로 누구보다 엄청난 능력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고, 병고침을 받고, 온갖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예수 부활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거나 더 큰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과는 거리낌없이 밥을 먹다가 이방인과 밥을 먹는 것을 꺼려하자, 여태까지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이제 갓 예수를 믿기 시작한 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합니다.
아무리 베드로라 하더라도, 아무리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더라도, 그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렇게 질책과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토대를 세운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다른 사람들 위에서 권위를 자랑하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향해 나도 예수의 종이요 사도라고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밝힐 정도로, 오히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가 아니었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는, 바울을 교회에 정착시키고 예수의 사도로 세워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바나바도, 그리고 위대한 순교자 스데반도, 오늘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며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로 살아간 사도 요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인정을 받고 더 높은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박해를 겪고 더 큰 고난을 경험해야 했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일꾼이 되고,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죽을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과 지도자들은, 그가 비록 베드로나 바울이나 요한이라 하더라도, 초대교회에서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접과 지위와 이익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의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이나 런던에 있는 세인트 폴 성당처럼, 베드로와 바울을 향한 칭송과 추앙은 후대에 있었던 것이지,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매를 맞고 투옥되고 온갖 박해를 겪다가, 결국 자신들을 제자들의 길로 불러주신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됩니다.
오늘 예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 다섯째 주일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고,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부활의 축복과 생명을 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요한처럼, 내가 누리는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세상에 전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오늘 저는 예배 후에 취임예배를 통해 이제 정식으로 경동교회 담임목사로서 목회를 시작합니다. 저는 신학을 시작한 이래로 종종 학교나 모임이나 강연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은 목사의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하면 목사는 어떤 사람,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가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목사의 정체성에 대해서 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목사는 Pontifex라고 생각합니다. 중세시대부터 교회의 사제나 목사 같은 성직자들을 부르던 특별한 호칭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라틴어로 Pontifex라고 합니다.
로마 교황청에도 가보면 그곳에 역대 교황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 앞에 알파벳 PONT.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보통 교황을 Pontiff 이렇게 부르는데 이 명칭이 바로 라틴어 Pontifex에서 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Pontiff, Pontifex가 바로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입니다.
그렇다면 이 Pontifex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이냐, 바로 오늘 설교제목인, “다리를 짓는 사람”, “다리를 놓는 사람”, 영어로 하면 bridge-builder 이런 뜻입니다.
다리를 만드는 사람, 바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저는 목사의 정체성과 역할과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목회자의 역할은 음식을 배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음식을 배달할 때 먼저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먹는 사람입니다.
배달하는 사람이 가슴에 커다란 명찰을 달고 자기 이름을 뽐내고 명품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리무진을 타고 배달을 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내가 그것을 맛보지 않더라도, 만든 사람의 보람과 먹는 사람의 행복이, 바로 전하는 사람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기쁨과 행복과 보람도,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 교우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과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역할이 비단 목사나 성직자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삶과 신앙이 담겨 있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한 사람들이 제사장이 되고 왕이 되고 예언자가 되고 성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사요 사제요 예언자요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엘서 2장 28절 이하를 보면,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면, 오늘 초대교회의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가 모두 예언자요 제사장이요, 우리가 모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성직을 맡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는, 바로 폰티펙스, 다리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믿고 복을 받아 이 땅에서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것보다, 우리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정체성은 부활하신 예수를 사람들로 하여금 만나게 하는, “다리를 만드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기쁨입니다.
예수 부활의 생명과 구원은 나에게 흘러들어 나에게만 머물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다리를 통해 또다시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 다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상 가운데 더 넓어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세느 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리가 퐁네프, 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퐁네프는 17세기 초에 건설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돌로 만든 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퐁네프 다리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다리에 새겨진 조각상들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이 다리 난간 밑에는 얼굴 모양의 여러 조각상들이 줄을 지어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조각상이 어떤 인물들이냐, 바로 그 다리를 건설했던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그 조각상에 새겨 놓으면서, 아마도 역사에 기억되고 무엇인가 남기기를 바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리를 지나가는 어떤 사람도, 그 다리를 구경하러온 사람도, 그 얼굴과 그 이름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반대로 저는 그 조각상의 얼굴이 누구인지 알고 난 다음에, 그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보다,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보다, 오히려 쓴웃음이 지어질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면서, 오늘은 특별히 여러분께서 저를 담임목사로 청빙해주시는 주일입니다.
비록 우리가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름이 없더라도, 얼굴이 없더라도, 폰티펙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다리를 짓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기도와 눈물과 땀으로 짓는 그 다리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세상과 이어질 때, 그것이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요, 다시 한번 이 땅에 우리 경동교회가 굳건히 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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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5 | 2025-05-25 | 부활절 여섯째 주일 |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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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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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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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1286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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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 2025-02-16 | 주현절 여섯째 주일 |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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