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죽은 믿음과 산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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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잠언 22:1-2, 8-9, 22-23/ 야고보서 2:14-17/ 마가복음서 7:24-37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9-05 |
전주 |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J. Pachelbel) |
찬양1부 | 주님을 찬양하여라(W. A. Mozart) 특송: 송승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님을 찬양하여라(W. A. Mozart) 특송: 송승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온 천하 만물 우러러(G. Slate) |
후주2부 | 온 천하 만물 우러러(G. Slate) |
성경본문 |
잠언 22:1-2, 8-9, 22-23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두고, 분노하여 휘두르던 막대기는 기세가 꺾인다. 남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그가 자기의 먹거리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가난하다고 하여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함부로 빼앗지 말고, 고생하는 사람을 법정에서 압제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2:14-17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서 7:24-37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
1.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분이라고 배웠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두로 지역에서 악한 귀신들린 딸을 둔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이방인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나 말씀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에게 매우 배타적인 유대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파괴하시고, 악한 귀신들린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신 이전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는 이방인 여자에게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막 7,27)는 말씀은 그래서 더욱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귀신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붓고(마 12, 22-34), 위선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 23,33)고 비난하시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면서(마 21,12-13), 노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기는 했지만(요 2,15), 복음서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이방 여인에게 했던 것처럼 모욕적인 언어와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배타적 인종주의자에 성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일까요?
진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여인이 ‘두로’ 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두로 지역은 전쟁의 실마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긴장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지역이었습니다. 두로인들은 유대인들의 가장 잔혹한 적들 가운데 하나였고, 주전 1세기에 두로인들은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는데, 주후 70년, 유대와 로마와의 전쟁 당시에도 두로의 이방인들은 상당수의 유대인 이웃들을 학살하거나, 쇠사슬에 채워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두로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부분적으로 유대지역이었던 갈릴리의 농업 생산량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갈릴리 인근의 주요 도시 지역이자 이방인들이 거주하던 두로에서 소비되었던 반면, 유대인 농부들은 굶주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대인 자녀들의 입에서 빵을 빼앗아 이방인 개들에게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부분적으로 두로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이런 역사와 사회적 긴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 여인이 그리스 사람이라는 말은, 그녀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 즉 페니키아 사회의 상류층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무리 유대인과 두로인들 사이가 적대적이라고 해도, 상류층에 속한 여인이 유대인 예수님에게서 ‘개’ 취급을 받는 것은 불쾌하고 모욕적이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 전승은 일반적으로 개를 부정적으로 여깁니다. 도시 외곽에 살면서(계 22,15) 부정한 동물이나 심지어 인간 사체를 포함한 썩은 고기를 먹는 들개들 때문이지요(출 22,31; 왕상 4,11). 그러므로 누군가를 개라고 부르는 것은 모욕이자, 부정함과 결부되었습니다. 신약성경도 개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태도를 이어받았는데,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서는 안 된다면서, 개들을 돼지들과 연계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마 7,6). 또한 개들은 흔히 반대자들이나 이단들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벧후 2,22; 빌 3,2 등).
그러므로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막 7,27)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다수의 유대인 교사들의 특징이었던 인종중심주의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두로인들에게 학살당했고 고난 받는 유대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회적 약자는 유대인이었기에, 예수님은 유대인 편에서 말씀하셨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은 배타적 우월주의나 인종주의적 발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 편에 선 예수님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적대감이 절정에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고난 받는 자기 백성들에 대한 호의를 지속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과 유대교 전승에서 개가 항상 부정적으로만 묘사된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이방인은 길들여진 개로 상징되기도 했고, 주인이나 초대받은 손님이 즐기는 식사는 아니어도, 주인의 집 안에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그리스 여인이 스스로를 자녀들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개라고 묘사한 것은 일부 유대인들이 유대교에 호의적이던 이방인들을 대하는 방식과 부합합니다. 어쩌면 마가는 이 여인의 반응에서 그녀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호의적인 ‘하나님 경외자’라는 암시를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는 이 여인 이야기를 통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이라는 빵을 먼저 받아먹은 자들로서, 자기들끼리만 그 빵을 나눌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서, 그들과도 복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유대인의 배타주의를 넘어서서 초대교회 당시 점증하던 이방인 선교의 확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이 여인 이야기에 이어서, 예수께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고, 거기에서 다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주신 이야기를 전한 것이지요(막 7,31-37).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가 두로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전쟁과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보도하거나,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초대교회 상황을 알려주려는 데 마가의 의도가 있다고 하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개 취급을 받고, 치욕적인 모독을 당하면서도, 그녀를 예수님에게 이끌어 그 분 발 앞에 엎드리게 한 것은, 귀신 들려 고통 받는 딸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모독도 감내할 수 있는 딸에 대한 사랑,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구하면, 예수님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하신다.’(약 1,6)는 믿음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경계를 초월합니다. 인종, 종교, 신분, 성, 아니 자존심의 경계도 넘어서게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막 7,28)라고 말한 것이지요.
모독과 경멸을 거리낌 없이 받아드리는 것을 넘어, 이제 스스로를 개라고 인정하면서까지 그녀는 호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 여인의 당돌함을 질책하면서 쫓아 보내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쩌면 그것이 예수님의 진심이었을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두로인들에게 당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과 지금도 당하고 있는 경제적 빈곤을 생각하면 결코, 어떤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이 이방여인에게 호의적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병든 딸에 대한 그지없는 사랑 때문에, 모욕과 경멸을 견디면서, 지혜로운 응답으로 호소하면서 예수님의 주장을 논박한 것이지요. 두로인들에게 고통 받는 자기 동족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귀신들린 딸을 가진 이방인 어머니의 고통도 알아달라고.
여인의 지혜에 놀란 예수님,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막 7,29)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변화시킨 것이지요.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이 이방 여인은 병든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욕과 경멸을 견디었고, 지혜로운 응답으로 딸이 치유 받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이겨 예수님을 변화시킨 유일한 인물로 복음서에 남게 되었습니다.
2. 그렇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지혜’(호크마)는 일반적으로 통전적인 이해력을 뜻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만이 아니라,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재치와 분별력과 생존 기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혜문학이라는 범주로 구별되는 성경은 욥기,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잠언입니다. 그 가운데 잠언은 여러 지혜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본래 히브리어로는 ‘마샬’(mashal), ‘비교’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70인 역에서 ‘비유’로 번역되었다가, 한자로 잠언으로 번역되어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잠’(箴)이라는 단어는 대나무 죽(竹)자와 모두 함(咸)자를 합성한 것으로, 떨어진 옷을 깁고, 자루를 꿰맬 때, 대나무로 만든 바늘을 사용한 것에서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대나무 바늘 같은 말씀으로, 찢어지고, 터지고, 구멍 난 삶을 고치는데 유익한 훈계라고 하겠습니다.
지혜는 오랜 세월동안 농축된 인간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히브리인들의 지혜문학이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의 지혜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분량과 범위가 고대 근동 문학의 기준에서 볼 때, 그렇게 큰 규모로 여러 다양한 장르(교훈, 속담, 수수께끼, 시)를 통합시켜 놓은 것은 극히 예외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런 지혜의 목적은 결국 인간에게 행복한 삶의 길을 가르치기 위한 것인데, 그 모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잠 1,7), 인간을 사랑하는데(잠 22,9) 있다는 것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이것이 모든 지혜의 목적이고,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말이지요.
3.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뗄 수 없다는 교훈은 야고보서 저자에 의해 신약성경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약 2,14-17).
야고보 공동체 안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신앙공동체의 인간차별이 죄를 짓는 것이고, 마지막 날의 심판 때에 범법자로 판정받게 된다고 합니다(약 2,9). 그리고 가난한 형제자매를 물질적으로 돕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약 2,15-17).
이로써 야고보서 저자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행함은 구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서신의 수신자들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고, 행함으로 완전해진 믿음이 산 믿음입니다(약 2,22).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난당하는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야고보서 저자가 강조하는 산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산 믿음의 대표적인 인물을 아브라함으로 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과 행함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약 2,23).
‘하나님의 친구!’,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이자, 신앙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요 1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믿음에 행함이 따르는 사람(야 2,17), 행함으로 믿음을 완전하게 하는 사람(야 2,22)이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주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한없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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