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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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성령
성경구절 사도행전 2:14-21/ 로마서 8:22-27/ 요한복음서 15:26-27, 16:4b-11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5-23
전주 오소서, 주 성령이여(D. Buxtehude)
찬양1부 거룩하신 주 성령(G. F. Händel)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의 성령 내리소서(C. F. Gounod)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성령으로 구주를 찬송하리로다(P. P. Knapp)
후주2부 성령으로 구주를 찬송하리로다(P. P. Knapp)
성경본문 사도행전 2:14-21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로마서 8:22-27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15:26-27, 16:4b-11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또 내가 이 말을 처음에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 오늘은 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 3대 축일이지요.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이자 승천하신 10일째 되는 날(1,9-11), 오순절에 예루살렘 성 안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모든 신도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1,13-14). ‘오순절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칠칠절의 헬라식 표현입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축제 때 보릿단을 바치고 난 후 50일이 되는 날에 시작되는 일종의 맥추감사절이었습니다. 그 후 이 절기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어 계약 공동체가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는데, 사도행전은 바로 이 절기에 최초의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자,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2,1-4).

 

우리의 성령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 바로 이 사도행전의 전승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은 세찬 바람처럼 힘이 있고,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온전함이며, 불길처럼 뜨거워 우리의 모든 죄악을 태워 없애시며,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하고, 불기둥처럼 앞 길을 인도하시고, 신앙의 확실한 증거로 방언의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약성경 안에는 성령강림사건에 대한 다양한 전승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이 첫 열매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도 바울은(8,23) 물론, 요한복음서의 저자도 성령강림사건을 특별히 오순절과 연결시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한에는 방언이 성령강림의 표징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성령에 대하여 약속하셨고(14-16), 오순절이 아니라 부활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20,22).

 

성령강림사건에 대한 성경의 이렇게 서로 다른 전승들은 성령이 누구인지, 성령은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성과 은사의 풍성함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하여, 예수님의 생애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를 증언합니다(1,18; 1,35).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났습니다(3,16-17; 1,10; 3,21-22). 같은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셔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게 하셨습니다(4,1-2; 1,12-13; 4,1-2). 그 후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4,14-19). 성령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하신 것이지요. 십자가 죽음을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28,19-20).

 

2. 성령의 다양한 임재 방식과 여러 가지 기능이 복음서에 전승되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복음만이 유일하게 성령을 보혜사’(parakletos)라고 표현합니다. 요한에 따르면, ‘보혜사’, ‘파라클레토스는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인데, 그 영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언하신다고 합니다(15,26). 그런데 보혜사, 진리의 영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 후에 제자들에게 보내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16,7).

 

그러므로 성령은 이미 오신 역사적 예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실 분으로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16,16)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일반적으로 위로자’, ‘상담자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의 본래의 뜻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함께 계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십자가 죽음으로 제자들을 떠나신 역사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재림하실 때까지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지금, 여기에서함께 하시는 현존 양식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령을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이신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방언을 비롯한 다양한 은사를 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믿음을 더 확실하고 견고하게 하는 영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3. 저는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의 신앙생활 후, 마침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학생들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수세자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네게 세례를 주노라선언하면서 차례대로 세례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속으로 확신했습니다. 목사님이 손을 내 머리에 얹고 세례를 주실 때, 분명히 하늘 문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태로 내 위에 내려오리라고.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비둘기는커녕 참새 한 마리도 내려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행여 눈을 좀 더 꼭 감으면 보일까 생각하고 질끈 눈을 더 세게 감았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내가 너무 교만했나? 예수님에게나 나타나신 성령을 감히,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 나 같은 인간에게 나타나길 기대하다니. 아무튼 그 때, 성령은 무언가 초인적이고, 초월적인 종교현상과 연관된다는 그 때까지의 믿음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무엇, 몸으로 체험 가능한 사건으로 확증되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다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내려온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은 성경에서 비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면서였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비둘기 이야기를 여러분, 다 아실 것입니다. 홍수 심판 후, 땅에서 물이 빠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노아는 비둘기 한 마리를 방주에서 내보내지요. 땅이 아직 모두 물속에 잠겨 있어, 비둘기는 발을 붙이고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그냥 돌아옵니다.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노아는 그 비둘기를 다시 방주에서 내보냈는데, 저녁 때가 되어 돌아온 비둘기가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고, 다시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그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8,8-12). 그렇습니다. 비둘기는 심판과 파멸의 시대가 끝나고, 회복과 생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상징이지요.

두 번째 비둘기 이야기는 제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으로 속건 제물을 바쳐야 할 때는 암컷 양 한 마리나, 암컷 염소 한 마리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양 한 마리도 바칠 형편이 못될 때에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속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5,6-7). 그렇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속죄 제물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하필이면 왜 비둘기 같은 형태로 임하셨는지 그 비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요? 부리와 발톱이 날카롭고 매서운 눈을 가진 독수리나 매와 같은 사나운 새가 아니라, 비둘기의 모습으로 성령의 임재를 묘사한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사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주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은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도 독수리는 제우스 신 자체이기도 하고, 그의 명령을 전달하는 메신저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인류를 위해 불을 훔친 죄로 프로메테우스는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데, 이 독수리를 보낸 신이 제우스이지요.

그러나 독수리가 단지 신화적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두려움과 위협이 된 것은 로마 제국의 군대 때문입니다. 300명의 기병을 포함하여 약 5천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레기온’(군단)은 독수리로 장식된 장대 아래 자기 부대의 상징 깃발을 걸었는데, 그 깃대 자체가 독수리를 뜻하는 단어인 아퀼라’(Aquila)로 불렸습니다. 이 독수리 깃발은 로마 제국의 영광의 상징이었기에, 독수리 깃발을 빼앗기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도 더 치욕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독수리는 비잔틴 제국의 상징으로, 다시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이 되었다가, 마침내 독일 나치의 상징이 되었지요.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이 세례와 함께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묘사한 것은 당시 로마 제국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 상징행위가 아니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과 파멸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와 생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상징, 구세주는 독수리 같은 권력과 군사력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속죄제물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상징 말입니다.

 

4.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령의 약속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세상의 미움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들을 세상에서 가려 뽑아내신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15,18-19). 그리고 그 미움은 박해와 회당으로부터의 추방, 환난과 처형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16,2; 16,33).

 

요한복음은 바로 주후 1세기 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박해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제자들과 달리, 이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의 박해와 추방, 심지어 환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제자들과 함께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안타까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둘 수 없기에(14,18),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혜사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고’(16,8),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6,13). 성령이 깨우치는 세상의 첫번째 잘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 목수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그와 함께 구원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세상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번째 잘못은 의에 대한 것입니다. 의는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를 의미합니다. 세상은 예수의 죽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끊어진 적이 없었고, 끊어지지 않았으며, 또 끊어지지도 않을 것임을 세상은 모르는 것이지요. 세번째 세상의 잘못은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통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통치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바로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세상과 충돌하고, 세상은 미움으로 대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사랑하는 것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따라서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5,19).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충돌 때문에 생기는 시련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진리의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오십니다. 성령은 세상의 미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제자들을 도와주십니다. 성령은 세상의 증오로부터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지키려고 하는 가치에 맞서게 함으로써, 오히려 세상과 충돌하게 만듭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모든 위험과 고통, 환난과 고난이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몸의 속량을 고대하며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령은 악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면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고난 받는 현실이 너무 무거워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성령은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심으로(8,23-27),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은 중보의 기도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8,27)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금방 응답받지 않는다고, 성령의 중보기도가 하나님께 들리지 않는 것 같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8,25).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5. 사도행전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다고 합니다(2,13).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예언은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2,15-18)는 약속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하는 때, 어디에서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 차별,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의 나이 차별, 주인과 종 사이의 계급 차별이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마지막은 기후위기나 자연재해, 감염병 재난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하여 젊은이들에게 환상이 없고, 늙은이들에게 꿈이 없는 때,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미래가 없을 때가 마지막 날이지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오늘, 이런 차별로 신음하고 있고, 환상과 꿈 없는 미래 때문에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8,21)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마라나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고전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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