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셋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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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
성경구절 사도행전 3:12-19/ 요한1서 3:1-7/ 누가복음서 24:36-4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4-18
전주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셨다(D. Buxtehude)
찬양1부 끝까지 견디는 자는(F. Mendelssohn)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G. Rathbone)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내 영혼이 은총 입어(M. Black)
후주2부 내 영혼이 은총 입어(M. Black)
성경본문 사도행전 3:12-19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빌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요한1서 3:1-7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

누가복음서 24:36-43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1. 영국 시인 T.S. 엘리엇(T.S. Eliot,1888-1965)은 그의 장시(長詩),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1922년에 출간한 434줄이나 되는 엘리엇의 이 장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은 사람도, 아마 이 시의 첫 번 째 줄은 들었을 것입니다. ‘황무지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셨다는 성배’(聖杯)의 전설을 배경으로 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어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저주를 받아 기근이 들고 강이 메말랐습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마음이 순결한 기사(騎士)가 황무지 한복판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성배를 찾아야 하는데, 만일 성배를 찾게 되면, 왕은 건강을 회복하고, 황무지는 다시 풍요롭게 된다는 것이지요.

 

엘리엇은 민간전승으로 전해오던 이 전설을 이용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폐한 유럽 사회의 허기와 갈망,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재생이 거부된 죽음을 황무지에 빗대어 그려낸 것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당시 엘리엇이 겪고 있던 신경쇠약증으로 고통 받던 자신의 상태도 함께 반영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봄비가 죽은 땅에서 잠든 뿌리를 일깨우고, 라일락을 키워내는 생명의 계절 봄을 엘리엇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목숨을 겨우 연명하고,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준 겨울이 오히려 봄보다 따뜻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호하고 역설적인 시의 비밀은 그런데, 이 시의 시작에서 드러납니다.: ‘한번은 쿠마에에서 나도 그 무녀(巫女)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에 위치한 그리스 식민지 쿠마에의 아폴로 신전에 유명한 무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폴로 신에게 한 줌의 모래를 들고 와서 손에 들고 있는 모래만큼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그녀를 사랑한 아폴로 신()은 그녀의 청을 받아들여 영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무녀는 젊음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생을 얻기는 했지만, 아폴로 신의 사랑을 거부한 후, 끊임없이 늙어갔습니다. 몸이 점점 쪼그라 들어 이제 조롱 속에 매달려 있게 된 그녀의 마지막 소원, 그것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운명, 마침내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계절에, 죽을 수도 없는 생명은 더 늙어만 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에, 모든 것이 끝에서 맴도는 운명 속에 갇힌 쿠마에의 무녀처럼, 시인이 경험한 전후 현대세계도 같은 운명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한이 맺혀 저승과 이승을 떠도는 혼령들, 온전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위로받지 못한 영혼들의 목소리만 들리기에, 4월은 그래서 그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 4월이 영국 시인 엘리엇에게만 잔인한 달이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4월은 실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계절입니다. 1919415일의 제암리 학살사건에서부터, ‘4.3 제주 양민학살 사건’(194843), ‘4,19 혁명’(1960419),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197048), ‘인혁당사건 피고 8, 선고후 18시간 만에 모두 사형’(197549), ‘대한항공 902편 소련 전투기들에 의해 격추’(1978420), 경남 의령군 궁류면 총기난사로 주민 62명 사망, 33명 중경상(1982426), 대구 도시철도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로 102명 사망, 117명 부상(1995428), 그리고 304명의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2014416), 모두 4월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진상이 온전히 규명되지 못하고 있고, 모든 책임자들의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한 맺힌 유족의 슬픔과 고통은 아직도 진도 앞바다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배 노동자들이 과로와 피곤으로 쓰러지는 아파트 계단에도, 하청노동자들의 몸이 기계에 끼어 절단당하는 공장에도, 이주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냉기로 가득 찬 비닐하우스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금도 또다른 세월호가 침몰 중이지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61년이 지났지만, 그 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외쳤던 학생들의 꿈, 통일과 자주(自主)는 아직도 다만 꿈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일까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도록 운명지어진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예루살렘 유대인 학살 기념관 야드 바셈, 그리고 뮌헨 근처 강제수용소 다카오에 기록된 스페인 태생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 Santayana, 1863-1952)의 말입니다.

 

우리가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이유, 그것은 더 이상 무책임한 정부 때문에, 우리 자녀들과 가족들과 우리 이웃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한책임을 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목숨을 잃은 이들의 죽음이 정치화되거나, 희화화되지 않는 나라, 죽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를 표하는 나라, 만들기 위한 것이지요.

 

우리가 4.19 혁명을 기억하는 이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바쳐 지키려고 했던 민주주의, 아직도 온전히 성취되지 못했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외쳤던 학생, 시민들의 염원인 평화통일도 요원한 미완의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권력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역사의 변혁을 원하는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희망의 원천입니다.

 

2. 우리가 믿는 하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은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고, 무지개를 그 언약의 표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지개가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은 노아와 숨 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다시는 홍수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9,15-16).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로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셨고(2,23-25),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축제와 안식일과 십계명의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해야 했습니다(13,8; 20,8). 예루살렘의 유대인 학살기념관 야드 바쉠에 기억은 구원을 앞당기고, 망각은 흩어짐으로 이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합니다.

교회도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누가복음서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들과 함께 걸으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녁때가 되기까지 함께 대화했는데도, 제자들은 그들과 대화하는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몰랐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24,13-29). 어쩌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과 달랐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하려고 앉았는데, 예수님이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그제서야 제자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24, 30-31).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기억했음이 분명합니다. 기억이 제자들의 눈을 뜨게 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이지요.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함께 모여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 일을 서로 나눕니다(24,33-35).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가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놀라 무서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십니다.

 

너무 충격적이고 놀라서 그랬을까요? 제자들은 그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다고 해서, 보았다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반드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한번 세례받았다고 회개가 필요없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라고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의 신앙체험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고 물으시고, 제자들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예수님에게 드리자, 예수님은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고 합니다(24,41-43).

 

이로써 누가는 예수님이 유령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다시 말해 살과 뼈가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초대교회의 전승을 유지하면서, 몸의 부활을 증언한 것입니다. 몸의 부활신앙은 물질을 죄악시하고 육체성을 구원의 장애라고 생각했던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고백이었습니다. 구원은 영적이고 동시에 육체적이며, 현재적이고 동시에 미래적인 총체적 사건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관계없는 구원, 우리 몸의 치유와 구원이 배제된 영혼구원은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제자들의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 계기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함께 나눌 때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이 깨달음으로 인도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성만찬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 안에서, 최소한의 기본적 인권도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를 기억하고,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기억의 반복적 재현이지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주일, 특정한 시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단순히 관습이나 전통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말씀 선포와 언약 회상의 반복적 재현입니다.

 

그런데,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과 빈번한 확산으로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예배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예배가 온라인으로 대체되고, 제한된 숫자만 모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남에게서 감염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남을 감염시킬 수도 있다는 배려 때문에, 주일성수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양해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예배를 독려하는 것은, 무슨 이단종파나 광신적인 종교지도자들이 줄어드는 헌금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 마치 바리새이즘이나 율법주의인양 가볍게 여기는 태도도 문제지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시대가 변했고, 통신기술의 놀라운 발전을 온라인 예배에 활용하는 것이 대세라고 하지만, 예배는 공동체적 사건이고, 집단적 기억의 재현이며, 눈으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갖춰 온 몸으로 경의를 표하여 배례하는 것이라는 예배의 본질이 훼손되면, 우리의 영혼도 덩달아 피폐해질 것이 더 두렵습니다.

 

3. 예배와 성만찬만이 공동체적 기억의 사건이 아닙니다. 치유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그 사람에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크게 놀라고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자기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치유한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그 사람을 성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3,16).

 

믿음이 그 사람을 치유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믿음, 예수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죽으신 나사렛 예수에 대한 기억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시어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함께 만났을 때, 치유를 가능하게 했다는 말입니다(3,15).

 

그렇습니다. 기억은 믿음으로 인도하고, 믿음은 구원을 선사(膳賜)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요한1서 저자에 따르면, 우리를 자녀 삼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사랑을 생각하는데서 시작됩니다(요일 3,1).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큰 사랑은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없애신 데서 드러났습니다(요일 3,5).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깨끗하신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요일 3,3).

믿는 자들의 행동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분의 존재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에 부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에 상응하는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요일 3,16). 그리고 그 사랑, 결코 플라토닉 러브(정신적 사랑)인 적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일 3,17-18). 그렇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육체적이고,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현실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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