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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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출애굽기 17:1-7/ 빌립보서 2:1-13/ 마태복음서 21:23-32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9-27 |
전주 | 주를 높이나이다(D. Zipoli) |
찬양1부 | 나 같은 죄인 살리신(Traditional American Melody) 특송: 김홍태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
지휘자 | |
반주자 | |
후주1부 | 주 음성 외에 참 기쁨 없도다(R. Lowry) |
후주2부 | |
성경본문 |
출애굽기 17:1-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이에 모세가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빌립보서 2:1-1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서 21:23-3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말하였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무리가 무섭소. 그들은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맏아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
1.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신 사건과(마 21,12-13),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을 고쳐주신 사건(마 21,14-17) 이후, 예수님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사이의 갈등은 과연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논쟁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그리고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느냐?’는 질문은 예수께서 누구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이지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병행말씀이 있는 마가와 누가복음서에 의하면 율법학자들도 가세했는데, 이들은 사실 예수님이 무슨 자격증을 취득한 율법학자나 제사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질문은 매우 의도적으로 꼬투리를 잡아,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모독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사렛 청년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라, 비아냥거림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이들에게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고 물어보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가지고 그들에게 다시 물어보신 것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운동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요한의 회개운동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며 말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백성들의 비난이 두려워, 그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전략적 침묵’(strategic silence)이라는 협상술도 있다지만, ‘모르겠다’는 대답 역시 그들의 질문만큼이나, 매우 정략적인 반응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비난받고, 저렇게 말해도 욕을 먹는 것이 두려운 이들이 흔히 취하는 무책임한 회피수단이지요.
그러자 예수님도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답변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신성모독이라고 단죄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사기 친다고 강변할 것을 예상한 정략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의 비겁함을 폭로하는 화법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예수님은 두 아들을 포도원에 보내는 아버지 이야기를 덧 붙여 말씀하시는데, 이 비유는 오직 마태복음서에만 전승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애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하고 말하였는데, 싫다고 말한 맏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는데, 그는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서는,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너무나 쉬운 질문입니다. 대답을 주저하거나, 질문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의심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지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질문처럼 답하기가 껄끄러운 것도 아니고, 청중의 눈치를 볼 일도 아니어서, 그들은 곧바로 대답합니다.: ‘맏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 21,31)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어떤 표정이었을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격노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와 창녀는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존재였습니다. 세리는 군대의 힘을 빌려, 납세자에게서 확보한 세금을 로마 당국에 정기적으로 보냈고, 그들 자신도 여기서 혜택을 누린 세금 징수자입니다. 식민지 종주국이자 점령국인 로마 제국에 협조하고 세금을 착취하는데다가 탐욕을 부린다하여 세리들은 유다 민중과 지도층의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는 부유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는 경멸의 대상이었고, 같은 유대인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영역 밖에 있는 죄인으로 취급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였던 것이지요.
창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가난에 찌든 팔레스타인 시골 지방의 경제적 상황만 고려해도 여성이 집안에만 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일할 힘이 있는 여성들은 모두 밖에 나가 일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남자들이 하는 일도 해야 했지만, 하위계층의 여성들은 주로 소매업에 종사하거나, 식료품 산업(빵 굽는 사람), 미용 영역(이발사, 화장품 판매인), 보건영역(여의사, 산파), 가정살림 서비스 영역(유모, 가정교사)에서 일했습니다.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창녀로 일하는 여성들, 술집 주인 혹은 여관이나 주점에 고용된 접대부도 창녀와 같은 위치에서 천시 받았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노예였거나,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난 면천인(免賤人)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가장 경멸을 받는 여성인 창녀들에게 의도적인 관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서에서는 이들과 세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시고(마 21,31-32),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한 창녀의 접근과 입맞춤을 허용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여인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그녀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약속하십니다(눅 7,36-5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유대 사회의 지도층 인사인 자기들을 사회적으로는 경멸과 천대와 증오를 받고, 법적 권리조차 박탈당한 세리와 창녀와 동일시하는 것도 충분히 불쾌한 일인데, 그들이 자기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그들을 격분시켰을 것입니다. 이런 선언,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충분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것이 자기들을 가리켜 하는 말씀인 것을 곧바로 알아채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다고 합니다(마 21,45-46).
그러나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을 격분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고, 세리와 창녀들은 들어간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열려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와서 보여준, 옳은 길을 믿지 않았고, 그것을 보고도 끝내 회개하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 길을 믿었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회개하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먼저 맛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 다만 회개함으로써 들어가는 나라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초점은 ‘예, 가겠습니다’ 대답하고는 포도원으로 가지 않은 아들로 대변되는 유대교 또는 지도층 인사들과 ‘싫습니다’라고 말했지만,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 아들로 대변되는 그리스도인 또는 사회적 약자들, 혹은 믿음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인과 회개한 비신앙인 사이의 대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먼저 가고, 나중에 가는 차이뿐, 대제사장과 율법학자에게도,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막고 있는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스스로를 사회지도층이라고 생각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경멸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개에로의 초대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들의 눈을 그가 기쁜 소식을 선포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게 함으로써 기쁜 소식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판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눈을 돌리게 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했지만, 끝내 순종을 거부한 아들과 같지만, 그들도 세리와 창녀들처럼 옳은 길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이 비유로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적대자들을 얻으려는 의도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자 모세에게 대들면서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합니다(출 17,2). 심지어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출 17,4). 그러자 하나님은 호렙 산 바위를 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출 17,6). 자기에게 대들고, 끊임없이 시험하는 자기 백성을 참으시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우리는 출애굽 후, 광야 생활 40년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사가는 이것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시고, 이 넓은 광야를 지나는 길에서, 당신들을 보살펴 주셨으며, 지난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계셨으므로, 당신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신 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에게 대들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오랜 참으심과 사랑의 역사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자기 높임과 그치지 않는 하나님의 자기 낮춤의 역사이지요.
3. 초대교회는 이른바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전승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내용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찬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 자기 비움(kenosis)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6-11).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양으로, 그것도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처럼,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과 자기 낮춤이 예수의 마음이고, 우리가 우리 안에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의 마음, 우리가 품고 싶다고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자기를 낮추기보다는 높이기를, 자기를 비우기보다는 자기를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남보다 자신을 더 낫게 여기고, 무슨 일이든지 겸손한 마음보다는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요(빌 2,3). ‘경쟁심’과 ‘허영’은 공동체 생활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악덕입니다. 저열한 마음과 투쟁심, 자기 과시와 허무한 자랑벽(癖), 거기에서 생기는 갈등과 다툼과 분열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보다도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잘 오지 않거나,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갈등과 충돌은 언제나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이지요.
사도 바울도 인간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빌 3,5-6).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는 동족으로부터 모진 고통을 받았고, 마침내 로마에서 참수형으로 삶을 마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인간적으로 획득한 모든 것들을 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했기에,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빌 3,8). 바울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음, 아무나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겸손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결코 존중받는 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에게 겸손은 종과 노예에게 속하는 굴종의 근성, 종의 속성이었고, 그래서 겸손은 ‘저급함, 무능함, 경박함, 나쁨, 아첨, 비굴함’ 등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겸손이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선한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평가된 곳은 유대교와 쿰란 공동체, 특별히 그리스도교뿐이었습니다. 겸손, 곧 자기를 낮추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진정한 공동체를 위한 기본 전제였고, 성실과 화합과 함께 초대교회의 기초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의 교회다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겸손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고서는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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