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십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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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출애굽기 20:1-6/ 빌립보서 3:4b-11/ 마태복음서 21:33-46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10-04 |
전주 | 주여, 내가 확신하나이다(D. Buxtehude) |
찬양1부 | 주의 은혜라(손경민 곡) 특송: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
지휘자 | |
반주자 | |
후주1부 | 우리 서로 받은 기쁨(C. A. Miles) |
후주2부 | |
성경본문 |
출애굽기 20:1-6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빌립보서 3:4b-11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서 21:33-46 "다른 비유를 하나 들어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다. 그는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에,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농부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스러질 것이요, 이 돌이 어떤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채고,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무리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무리가 예수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
1. 모세가 출애굽 후, 시내 산 꼭대기에서 ‘십계명’을 받은 것은 지금부터 약 3,300년 전의 일로 추정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시내 광야에 이른 바로 그 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 19,4-6).
계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브릿’은 쌍방적이고 변경 가능한 계약(covenant)이 아니라, ‘테스타멘트’(Testament), 곧 ‘유언’(遺言)과 같이 일방적이고 궁극적인 계약을 뜻합니다. 십계명도 하나님의 명령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이고 변경 불가능한 계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십니다.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놀라운 이적과 사랑으로 해방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이며, 노예였던 히브리인들과 평등한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가운데서 주님의 보물이 되고, 주님이 선택한 백성,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 19,4-6)는 것이지요. 이런 약속, 이스라엘을 제외한 땅 위에 있는 어느 민족, 어느 나라도 받지 못한 약속입니다. 비록 계약의 파트너였던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신실하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언약에 충실하셨다는 의미에서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의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세우신 언약은 십계명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십계명은 열 개의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처음부터 그렇게 열 개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후에 편의상 그렇게 구분된 것인데, 동방정교회와 루터교를 제외한 개신교회, 고대 랍비 전통과 현대 유대교, 라틴교부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는 각각 다르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교파마다 그 구분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십계명은 하나님이 두 번이나 친히 써서 자기 백성과 맺은 ‘성문계약’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 두 곳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십계명은 대동소이한데, 출애굽기는 안식일 규정의 근거를 하나님의 창조와 쉼에서 찾는데 비해(출 20,11), 신명기는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는 차이가 있습니다(신 5,15). 그리고 마지막 계명에서 출애굽기는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출 20,17)고 하여 이웃의 아내를 재산으로 여기는 반면, 신명기는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는 규정을 독립적으로 제시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신 5,21).
오래 전, 미국의 방송인 테드 코펠은 듀크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당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덕적 붕괴의 징후들을 일일이 열거한 뒤,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십계명을 지키는데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마치 십계명이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미국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도덕 원리임을 시사한 것이지요. 그러나 어찌 미국인들에게만 그렇겠습니까! 인류가 십계명을 지킨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3,300년 전에 주어진 십계명을 우리 시대의 윤리적 규범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이 성서에 나타난 모든 윤리의 요약이자, 그 출발점이라고 보는 관점을 유지하는 유대교와 이슬람은 십계명만이 아니라 파생된 율법들을 지금도 타당한 신의 명령이자 규범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십계명을 꼭 문자적으로 받아드리지는 않을지라도, 십계명을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성을 간직한 윤리서로 보는 상당수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오늘의 윤리적 규범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키기 어려워서 그렇지만, 지키지 않는 우리의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거나,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잘못된 신앙이 교회 안에도 있는 현실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요? 탐욕과 욕망의 충족을 경제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면서 결코 쉬지 못하는, 아니 쉴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공경과 부양이 아니라, 경멸과 학대로 변한 세상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제도화된 살인인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묻지마 살인’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세상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이 상품화되고, 착취되고, 이혼률은 끊임없이 증가하는 세상에서 간음 금지명령이 얼마만큼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에서, 큰 도둑은 잡히지 않고, 작은 도둑들만 잡히는 세상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도대체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온갖 가짜뉴스와 ‘아니면 말고’식의 명예훼손과 상처내기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과연 얼마나 먹혀들까요? 남에게 먹히기보다 남을 잘 먹어야 출세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평생을 모아도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살 수 없는 현실에서,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과연 얼마나 우리의 탐욕과 절망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십계명을 우리의 현실, 우리의 일상에서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명과 현실이 충돌하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믿음이 없어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결코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확인해주고, 인간의 죄성(罪性)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 없이 단지 명령만 하셨다면 십계명은 그런 역할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로 이집트의 바로와 그의 온 집안을 치셨고’(신 6,22),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강한 손으로 이끌어 내셨으며’(신 6,21),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인도하셨고’(출 19,4),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 19,5-6)는 약속과 함께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단지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로 우리를 지키시면서,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주신 약속 있는 명령인 것입니다(신 6,24).
계명이 자칫 율법주의로 전락하면,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옥죄고, 파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도덕률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십계명은 구약성경에서 613개의 율법으로 확대되었고, 계속하여 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습니다. 구원이 율법 준수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서 율법은 더욱 확대되었고, 정교해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지금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율법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아이를 안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돌을 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돌을 든 아이는 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지요. 일종의 율법주의가 일상생활을 옭아매는 족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계명을 성심껏 지키는 것이지(신 6,3), 율법주의에 빠져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조차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획득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체성에 덧붙여, 성장하면서 획득한 바리새파 사람으로서의 신념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까지 한 인물이었지요(빌 3,5-6).
그가 얼마나 율법에 투철한 인물이었는지는 그가 태어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 이스라엘 민족이며, 히브리 사람임을 강조하는데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인이라는 이름은 이방인이 흔히 경멸적인 감정을 저변에 깔고 부른 유대인이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언제나 종교적인 음색을 지닌 호칭이었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선전언어였던 것이지요. 히브리인이라는 칭호 역시 이스라엘의 위대한 과거를 말할 때 주로 사용한 개념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이라고 칭해질 때, 이 사람은 고향과 민족의 관습을 성실하게 지킨 사람으로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바울이 얼마나 유대교적 경직성과 철저성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토라에 순종하는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후,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빌 3,8).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도대체 무엇을 알았기에,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쌓아온 그의 삶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을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오물처럼 여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생기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가 진정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빌 3,9).
그래서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빌 3,10). 우리는 여기서 부활과 고난의 사건 순서가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난, 죽음 이후에 부활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힘,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을 수 있는 힘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고난과 부활은 그리스도의 운명을 모범 삼아,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 따라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치욕과 궁핍을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의 규범으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이고 운명적인 이런 연결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빌 3,10).
이런 본받음을 통하여 바울은 마침내 그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는 까닭은, 그 일을 통하여 우리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명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되라는 초대이자, 동시에 약속 있는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출 20,5-6).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 계신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 속에 끊임없이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마치 악한 포도원 소작인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맡긴 포도원 주인과 같습니다.
3.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들에 의해 아들이 죽임을 당한 포도원 주인의 보복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비유라기보다는 당시 부재주지에 대한 갈릴리 농부들의 혁명적인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멀리 떠난 것으로 보아, 어쩌면 외국에 살고 있는 부재지주였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출을 받으려고 보낸 종들이 치욕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자, 마침내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최소한 자기 아들은 존중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것은 주인 없는 재산은 먼저 점유한 자가 우선권을 갖는 당시의 법을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등장은 농부들로 하여금 지주가 죽었으며, 아들이 그 유산을 상속받으러 온다는 추측을 하게 했고, 그들은 그 아들을 죽이면, 그 포도원은 누구든지 당장 소유할 수 있는, 주인 없는 재산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사야서 5장 1절부터 7절까지의 포도원의 노래를 소재로 한 이 비유는 포도원을 이스라엘에, 소작인들을 이스라엘의 지배자들과 지도자들에, 지주는 하나님, 사자들은 예언자, 아들은 그리스도, 농부들의 처벌은 이스라엘이 거부당함을 상징한 것이고, 다른 백성은 교회를 비유한 것이 분명합니다.
마태의 작성 시기로 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이 구조화된 시기를 반영하는 이 비유는 시내 산에서의 계약체결 이후, 예루살렘의 멸망과 교회의 설립을 거쳐 마지막 심판에 이르는, 구원사의 개요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위협의 말이자, 마지막 순간의 간청이며, 심판 비유 가운데 가장 예리한 비유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거듭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최후의 사자마저 거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포도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듯이 하나님의 약속은 유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약의 촛대를 옮기시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계 2,5).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백성의 촛대를 다른 백성에게 옮김으로써, 하나님은 구원사를 이어가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세워준 언약을 지키는 백성에게는 그들을 주님의 보물, 거룩한 민족, 제사장 나라로 만드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 19,5-6). 출애굽기가 ‘제사장 나라’라고 묘사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전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중재자로 나서 자신을 희생하며 조정자 역할을 하고 나아가 계명들을 준수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도 않은 여러 민족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보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삶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목적을 위해 부름 받았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것이 십계명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자신에게는 소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도덕적 인간이 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근본정신과 율법주의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근본정신은 탐욕으로부터의 자유이고, 그 자유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데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자유 안에서 기쁨으로 계명을 지키는 신앙 공동체를 주님은 지금도 자신의 보물로, 주님이 선택한 백성으로, 거룩한 민족, 제사장 나라로 만드실 것입니다(출 19,5-6).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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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 | 2025-06-08 | 성령강림주일 | 하나님 안에서 | 임영섭 목사 |
1296 | 2025-06-01 | 부활절 일곱째 주일 | 하나님의 의 | 임영섭 목사 |
1295 | 2025-05-25 | 부활절 여섯째 주일 |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 임영섭 목사 |
1294 | 2025-05-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하나님의 집 | 임영섭 목사 |
1293 | 2025-05-11 | 부활절 넷째 주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 임영섭 목사 |
1292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1291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1289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1288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1287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1286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1285 | 2025-03-16 | 사순절 둘째 주일 | 전력을 다한 달음질 | 임영섭 목사 |
1284 | 2025-03-09 | 사순절 첫째 주일 |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임영섭 목사 |
1283 | 2025-03-02 | 주현절 여덟째 주일 | 산 아래로 내려가라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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