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무엇이 사람을 더럽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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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45:1-8/ 로마서 11:1-2a, 29-32/ 마태복음서 15:10-20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8-16 |
전주 | 주여 높이 찬양 받으소서(J. N. Hanff) |
찬양1부 | 오 나의 구주여(Charles Gounod) 특송: 박진경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온 맘 다해(Bobbie Mason) 특송: 김호 집사, 김유정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찬양하나이다(J. Ellor) |
후주2부 |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찬양하나이다(J. Ellor) |
성경본문 |
창세기 45:1-8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로마서 11:1-2a, 29-32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15:10-20 예수께서 무리를 가까이 부르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그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는 줄 모르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
1. 성경에서 가장 오해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일 것입니다. 특히 복음서들 가운데 마태복음서 저자가 바리새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집단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와 편견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 전쟁 후, 유대가 로마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을 때, 유대인의 역사를 2천년동안 지속시켜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경전의 결집, 회당과 교육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의 정체성 유지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전쟁 후, 사두개파, 쿰란의 에세네파, 젤롯파(열혈당원) 등 모든 종파들이 소멸 당했으나, 오직 바리새파 사람들만 살아남아, 유대교를 지탱하는 핵심이 되었고, 비록 나라와 정치적 독립은 상실했으나 종교적 전통을 이들이 지켜낸 것이지요.
바리새파 사람이자, 동시에 유명한 율법학자였던 인물들은 비록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유대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 주전 30년-주후90년)입니다.
주후 66년부터 70년까지 진행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네로 황제(주후 37년–주후 68년)는 베스파시아누스(주후 9년-주후79년) 장군에게 시리아 군대의 총지휘권을 주면서 그를 파견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68년에 그는 유다왕국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유대 열심당 정예군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예루살렘만은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주민들이 굶주려 항복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도성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부에서는 항복하자는 사람들이 있었고, 강경파인 젤롯파는 결사항전을 주장했습니다. 성 안에서 유대인들끼리 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상황은 성안에서 굶어죽든지, 전염병으로 죽든지, 아니면 로마 군인들에게 학살당하든지 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무렵, 바리새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는 유대전쟁이 결국에는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나라와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뿌리 없는 백성이 되어 디아스포라가 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유대교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평화를 얻기 위해 항복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강경파인 열심당에 의해 거절당하자, 그는 자신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 관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빼내게 합니다. 관에서 나온 벤 자카이는 로마군 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막사로 갑니다. 그는 머지않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다 나라가 사라질지라도, 학교만은 남겨달라고 부탁합니다. 바리새파 랍비의 예언에 놀랬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 황제, 네로가 같은 해, 자살합니다. 그 뒤 세 명의 정치군인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 만에 살해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됩니다. 로마 원로원은 주후 69년 그를 새 황제로 즉위하게 합니다. 그래서 유대전쟁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서 종결된 것이지요.
황제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임사령관인 아들 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살아남은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를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얌니아(지금의 야브네)로 가서, 거기에 율법학교를 세웁니다. 그리고 유대교 경전을 정경으로 만들고, 여기서 교육받은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져 회당을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침으로써, 유대교의 정체성을 지켜가게 된 것이지요. 그 후, 2천년 동안 나라와 성전을 빼앗기긴 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유대인과 유대교 전통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의 갈등과 대결의 산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서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강력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사실 바리새파의 주장과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많은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서민출신의 배경을 가지고, 민중에 기반한 유대교 갱신운동을 했다는 것, 부활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그런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유대 전쟁을 전후로 하여,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갈등의 배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비폭력 저항 정신 때문에 유대전쟁 참전을 거부했다는 것, 예수님은 다윗왕조의 회복과 결합된 민족적 메시아 대망의 성취자가 아니라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실망감,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치 기대가 탈군사주의적이라는 점,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과 다윗왕조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기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선포했다는 것,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형식주의와 공로주의를 비판하는 예수님의 자유로운 태도 등이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함께 묶어서 표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같은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두 집단은 전혀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탄생 배경과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시간에 말씀드리고, 오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유래와 성격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은 ‘나누는 사람’, 혹은 ‘구별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이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라 했던 것에서 유래하는데, 스스로를 ‘구별된 자’, 즉 이스라엘의 참된 공동체요 성도들이라고 생각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상층계급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는 성서적인 지식이 없는 민중출신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처음으로 출현했던 때는 주전 2세기, 하스몬 왕가 시대인데, 이들은 하나의 정당에서 경건운동으로 전환하여, 주전 1세기에는 이들의 종교적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들은 구약외경인 마카베오 상, 하에 언급되는데, 마카베오 상 2장 42절에 의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의 단체’, ‘용감하고 율법에 온전히 헌신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체’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바리새파 가입규정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지망자들은 가입하기에 앞서 한 달 내지 일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이 시험 기간 동안 정결규정을 엄수할 수 있다는 신뢰성을 입증해 보여야 했습니다. 이 시험 기간이 끝나면 지원자들은 공동체의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고, 특별히 정결규정과(마 15,1; 막 7,1; 마 23,26-26; 눅 11,39-41) 십일조 규정들을(눅 18,12; 마 23,23; 눅 11,42) 반드시 준수해야 했습니다.
헤롯 왕 시대와 헤롯의 왕국확장 시대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2만5천에서 3만 명 정도였고, 사제와 레위인들은 대략 1만 8천명, 에세네파는 4천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약 6천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집단의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주후 1세기 예루살렘에, 여러 개의 바리새파 공동체가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3. 마태는 바리새파 집단과 율법학자 집단을 단일체로 언급함으로써, 율법학자들의 허영심과 명예욕에 대한 비난과, 종교적인 정결규정과 십일조규정을 엄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에 대한 비난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두 집단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을 매우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오해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비난의 내용이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이 두 집단을 같은 지평에 놓고 비판한 것은 바리새파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유력자들이 – 아주 소수였지만 – 동시에 율법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파 공동체들 가운데 압도적인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평민들이었고, 성서에 대한 지식이 없던 소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상인이거나 수공업자, 농부들이었지만, 진실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리새파적 율법학자들의 종교법적 규정들을 준수하지 못했던 대다수의 민중들, 곧 ‘암하렛츠’(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 바빌론 포로기에 팔레스틴에 거주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주전 2세기부터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 특히 비(非)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음 – 비정한 태도를 취했고, 자신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흠잡힐 데가 없고, 비난은커녕 오히려 칭찬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고, 또 그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정결규정’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데서 사회적 존경을 받았습니다. ‘정결규정은 밖으로는 경계를 짓고, 안으로는 한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라는 몸체의 전체성과 완전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합니다. 정결규정은 무엇보다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소수의 유대인들이 다수에 의해 동화될 위험이 큰 곳, 즉 디아스포라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또 외세의 통치와 그로 인한 이교도적 지배 구조가 자리 잡고 있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경계 짓기’에 대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할례와 안식일 규정, 식사 전후의 씻는 행위, 장례와 출산, 부정한 것과의 접촉 이후의 정결규정, 음식에 대한 정결규정, 성적 금욕과 광야로의 은둔 등의 삶의 방식은 ‘사회와 타자에 대한 거리두기’를 의미했습니다.
정결규정, 음식규정, 십일조 납부의 엄격한 준수 외에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일체의 사치를 혐오하는 소박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 심판신앙, 천사신앙과 같은 새로운 종교적 경향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개혁적인 집단이었고, 모든 것이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인간중심적 구원론을 주장한 사두개파와 모든 것이 미리 운명으로 규정되었다고 예정론을 주장한 에세네파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일종의 ‘신인협력설’을 주장한 것이지요.
4.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다고 제자들이 전한 것입니다(마 15,12). 바리새파 사람들이 분개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엄격하게 지키는 정결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결법을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명령형의 요구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정결하거나 혹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진술이 직설법 형태로 언급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판은 정결법 그 자체와 그것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정결한 것인지 불결한 것인지를 구별하는 일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잘 살피면서, 정작 입에서 나오는 것들,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 마음은 살필 줄 모르는 것, 아니 살피지 않는 그들의 태도가 문제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눈 먼 사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마 15,14). 그러나 사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누구보다 눈이 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은 먹어도 되는지, 무엇이 불결한 것인지, 불결하지 않은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거나, 보지 않기에, 이들은 위선자라고, 눈 먼 사람을 구덩이에 빠뜨리는 눈 먼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비난하신 것이지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이들이 자신에게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만큼 율법과 도덕성에서 엄격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니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박해한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우리는 진실로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여 존중받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자신의 잘못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잡아먹을 듯이 독기어린 눈을 부릅뜨고 덤벼드는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덕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한 사람이지요.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온화하고 자신을 지킴에 있어서는 가을 서리처럼 엄 하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세 번째 비판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보다 그들의 전통을 더 우위에 놓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가르침,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계명보다 더 위에, 혹은 같은 위치에 놓는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이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해도,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로 교리를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고 비난하신 것입니다(마 15,8-9).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십계명 가운데 다섯 번째 계명인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을 예로 드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출 20,12; 신 5,16). 그리고 정작 사람을 더럽히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의 목록(마 15,17-20),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도 십계명과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의 목록을 십계명에서 제시함으로써,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의적인 계명해석을 계명 자체보다 우위에 놓는 것을 비판하신 것이지요.
물론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율법도, 윤리적 규범도 세월과 함께, 시대와 더불어 변합니다. 성경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 안에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역사서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정체제에 대하여 우호적인 사관이 있는가 하면, 매우 비판적인 사관도 있습니다. 복음서도 하나가 아니라, 네 개가 있어, 그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한 복음서 안에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채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다양하고, 때로는 내용에서도 충돌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불확실성과 의심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의 다양성과 성경 해석의 개방성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말씀을 자의적(恣意的)으로, 다시 말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교 교회가, 자신의 편견과 증오를 강화하고, 타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사용, 혹은 악용해 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동원하여 여성과 유색인종 차별을 정당화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린 반유대주의, 십자군 전쟁, 원주민 학살, 인종주의, 이슬람 포비아, 동성애자 혐오 등이 성경의 이름으로, 성경과 함께 정당화해온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경을 자기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찢어발기면서, 문자주의적으로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우리도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말씀을 자기이익을 위해 왜곡하는 것의 결과는 말씀 자체, 계명과 율법의 파괴이자 그리스도교 정체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말씀 자체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거슬린다고 해서, 말씀 자체를 폐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히 4,12-13).
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폐기하는지, 말씀 자체가 그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다 밝혀낸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더욱 더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빌 2,12).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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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9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서울주교좌성당) |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 임영섭 목사 |
1298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경동교회) | 주님과 함께 춤을... | 박성순 신부 |
1297 | 2025-06-08 | 성령강림주일 | 하나님 안에서 | 임영섭 목사 |
1296 | 2025-06-01 | 부활절 일곱째 주일 | 하나님의 의 | 임영섭 목사 |
1295 | 2025-05-25 | 부활절 여섯째 주일 |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 임영섭 목사 |
1294 | 2025-05-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하나님의 집 | 임영섭 목사 |
1293 | 2025-05-11 | 부활절 넷째 주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 임영섭 목사 |
1292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1291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1289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1288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1287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1286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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