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둘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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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물 세례와 불 세례
성경구절 이사야서 43:1-7/ 사도행전 8:14-17/ 누가복음서 3:15-17, 21-22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1-13
전주 요단강가에 오신 주 예수(D. Buxtehude)
찬양1부 하나님께 찬송드리세(G. F. Händel)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 안에서 기뻐하여라(F. Schubert)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영광의 주를 다 찬양하라(J. M. Haydn)
후주2부 찬양하라 내 영혼아(L. Smith)
성경본문 이사야서 43:1-7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다. 너의 구원자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내주어 너를 구속하겠고, 너를 구속하려고,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쓰바를 내주겠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 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사도행전 8:14-17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냈다.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누가복음서 3:15-17, 21-22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1. 세례는 그리스도교가 전승하고 있는 일곱 성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사(Sacrament)’는 카르타고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240)가 200년경 그리스어인 ‘미스트리온’(μυστριον), 곧 ‘신비’를 의미하는 단어를 라틴으로 번역한 ‘사크라멘툼’(Sacramentum)에서 파생된 말로서, ‘성별된 것이나 행동’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세례, 견진, 성체, 고해, 혼인, 병자, 성품성사 등 일곱 가지 성사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데, 가톨릭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확정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던 트리엔트에서 18년 동안 진행된 공의회(1545년부터 1563년까지)에서 이 일곱 성사를 교리로 확정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 의하면(1213항)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라고 합니다.

 

세례성사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라는 말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 세례성사를 받지 않으면 다른 성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세례성사를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종교개혁 전통 위에 서있는 개신교는 이 가운데 오직 세례와 성만찬만을 성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유아 세례에 대한 논쟁으로 교회가 다투고 분열된 아픈 역사가 있지만,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유아세례와 성인세례를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주는 방식은 교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정교회와 침례교는 지금도 침례 탕에 온 몸을 담그는 침례를 하는데, 가톨릭교회와 대부분의 개혁교회는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세례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밥티조’(Βαπτιζω)는 ‘잠기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교회는 단어의 본 뜻대로 침례를 행함으로써, 정결하게 씻기고 묻힌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뜻이지요. 침례를 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머리에 세 번 물을 붓고 세례를 주는데, 이마에 물 혹은 올리브유로 십자가 표를 함으로써 세례가 명백하게 죽음과 새로운 탄생과 관계된 것임을 상징합니다.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가장 오래된 초대교회 침례 탕의 형태가 십자가 모형이라는 것도 세례가 죽음과 관계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 연구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세례반’(洗禮盤, baptismal fonts)이 아니라, ‘세례무덤’(baptismal graves)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후 326년경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파로스 섬에 있던 ‘백개의 문을 가진 성모’라는 이름의 초기 비잔틴 교회에서 발견된 세례 탕이 그 증거입니다. 관(棺)처럼 땅 밑으로 파인 십자가 형태의 세례 탕은 세로의 발치 부분과 머리 부분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발치 부분으로 들어와 십자가의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한 가운데서 뒤로 눕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일으켜 세워짐으로써 세례를 받은 후, 머리 부분 계단으로 올라가 나갑니다.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의 길, 이것이 세례성사의 의미입니다.

 

2. 그런데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은 도대체 이 세례 예식이 어디에서 그리스도교로 들어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에 요단강 주변에 있던 쿰란공동체의 에세네파 정결의식으로부터 요한이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 안에는 다양한 종파들이 있었는데, 한편의 극단에는 무력과 폭력으로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을 추구했던 젤롯파가, 다른 한편의 극단에는 에세네파처럼 철저한 금욕생활과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재촉하려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세네파에게 세례는 정결과 입교의 예식이었고, 에세네파였던 요한이 에세네파의 세례예식에 ‘죄를 용서받게 하는 의미’를 더하여 세례를 주었던 것이지요(막 1,4-5). 그래서 세례를 받는 이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막 1,4-5). 요한이 세례를 주기 전에 회개를 요청한 것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확신 때문이었고(마 3,2),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심판과 구원을 동반하기 때문에(마 3,7-10) 회개는 구체적이어야 했습니다(눅 3,8-14).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는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막 1,9)는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보도합니다. 어떤 이유도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도 단순하게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눅 3,21-22)고 보도합니다.

 

다만 마태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자, 요한이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때에야 요한이 세례를 주었다고 보도합니다(마 3,14-15).

3. 요한의 물세례를 예수님의 성령과 불세례와 대립시키고, 요한을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 여김으로써, 물세례를 성령세례보다 열등한 것, 혹은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복음서의 시각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세례 이야기 때문에 더 강화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았으나 그들 가운데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은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여 성령을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행 8,14-17).

 

그러나 과연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다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라는 용어는 구약이나 유대교 사상에 아주 익숙한 것이었고, 마지막 날에 성령이 임한다는 사실이 구약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이 32,15; 44,3; 에제 18,31; 36,25-27; 37,14; 39,29; 요엘 2,28 이하). 특별히 이사야서 4장 4절에서는 정결과 심판의 영과 불의 영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과 영의 대조는 익숙한 것이었고(이 44,3; 에제 36,25-27), 심판과 불(이 29,6; 31,9), 심판과 바람도 연결되어 있습니다(이사야 40,24; 41,16).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언한 것은 그것을 물세례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옛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임재는 정결 또는 심판과 구원의 방편으로 이해되었던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면서, ‘지금은 그렇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고 마태는 보도합니다(마 3,15).

예수님은 도대체 무슨 의를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까요? 교리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가 없는 예수님이 어떻게 죄 사함의 표징인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일까요?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물속에 잠겼기 때문에 죄의 고백을 하실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비밀은 전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의 표징인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그 자신도 죄 사함을 받아야 할 인간 조건 안에 자신을 두신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성육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 많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스스로 죄인이 되심으로써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예수님의 세례에서 계시된 하나님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모든 의’, 그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전체 목적, 곧 용서와 구원의 선취입니다.

 

이를 미쁘게 보신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자신의 영을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마 3,16-17; 막 1,11; 눅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왔다는 것은 성령 임재의 다양한 형체의 하나를 표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곳에서 성령은 ‘세찬 바람처럼’(행 2,2),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처럼’(요 3,8) 임하시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처럼’(행 2,3) 묘사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행 2,38)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형체로 내려오셨다는 것은 창세기의 노아 홍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홍수 심판 후,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비둘기 한 마리를 방주에서 내보냅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그에게로 되돌아온 비둘기는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고, 그것으로 노아는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창 7,10-12).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에’(마 3,16)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시작될 물의 심판과 죽음, 새로운 탄생과 두 번째 창조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비둘기 형체로 표상한 또 다른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속죄의 상징이 들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비둘기는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호 7,11; 11,11), 아가서에서는 광범위하게 아름다운 신부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죄에 대한 보상으로 속죄 제물과 번제물로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레위기 5,7; 12,6 등). 산비둘기이건 집비둘기이건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제물이었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이적의 표징이 아닙니다. 비둘기는 그리스도의 운명, 자신을 속죄를 위한 번제로 바쳐야 할 그리스도,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작되는 구원과 새로운 창조를 계시한 사건입니다.

 

성령이 불로 표상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세례가 정결과 입교의 의미를 가진다면, 불로 표상되는 세례는 성령임재의 표징이자 동시에 정화의 의미를 가집니다. 물은 깨끗하게 하지만, 불은 모든 것을 소멸(燒滅)합니다. 그런데 물과 불은 서로 상극적입니다. 물은 불을 끄고, 불은 물을 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상보적이기도 하지요. 물과 불은 인간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과 빛이 없이는 어떤 생명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받는 세례와 성령과 불로 받는 세례는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4. 예언자 제2이사야는 물과 불의 위협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이 43,1-2).

 

여기서 물과 불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고,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속량하시고 지명하여 부른 백성, 하나님이 자기 것으로 만든 백성과 함께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이 43,2)는 하나님의 이런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서의 대위임령도 제2이사야의 이 말씀에 대한 회상과 관계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8-20).

 

사람이 두려움을 갖게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5.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초대 비잔틴 교회에서 세례성사는 십자가 형태의 관처럼 생긴 세례 탕에서 행해졌습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을 반영한 건축양식입니다. 로마 제국의 불의와 폭력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기억이자, 로마제국의 가치를 거부하여, 로마 제국에 대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한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는 공간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롬 6,3-4)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에 의하여, 로마제국에 대하여 죽으셨으나,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향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로마 제국에 대하여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당대 로마 제국을 유지하고 있던 세 가지 기본적인 차별, 곧 인종적, 사회적, 성적 차별 위에 서있던 로마문명의 가치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태어나는 새로운 피조물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7-28).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세 집단, 곧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위계적으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종교적이고 인종적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그리고 가족과 가사노동에서 상하관계로 규정된 세 집단의 차별적 구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이들이 모두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고전 12,13).

 

그렇습니다. 세례는 단지 교회라는 공동체의 한 식구가 되는 입교예식이나 자격이 아닙니다. 세례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를 받고서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세상 가치를 따라 살면서 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면, 세례를 아무리 많이 받은 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계와 타인과 사물을 보는 우리의 시야가 전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이고, 그러므로 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었다가 살았으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다시 태어났으니,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신 분을 위하여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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