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열한째주일
2018-11-09 10: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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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무엇이 합당하냐
성경구절 요나서 4:1-11
설교자 박나혁목사
예배일 2016-11-16
예배 수요
오르간전주
찬양1부
지휘자 정록기
반주자 채문경
찬양2부
지휘자 김선아
반주자 신채우
후주1부
후주2부
성경본문 요나서 4:1-11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셨다. 요나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니느웨. 주전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고대 근동에 대표적인 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
앗시리아는 이스라엘과 뼛속 깊이 원수지간이었던 국가입니다. 주전 931년경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 중에 북이스라엘이 마지막 왕 호세아 때에 이르러 앗시리아의 사르곤2세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앗시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사르곤2세는 정복한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지역으로 여러 이방민족을 강제로 이주시켜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과 신앙을 뒤섞어 버리고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남유다도 멸망의 위기는 모면하였지만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앗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늘 노심초사 눈치를 보며 지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앗시리아라는 국가는 그런 원수 국가가 따로 없습니다. 성서가 아닌 일반 역사서들을 읽어보아도 앗시리아는 항상 무식하여 용감하기에 오히려 광폭하고 잔인무도한 폭도들이며, 힘만 매우 세서 주변국들을 아주 잔혹하게 유린했던 악마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철두철미한 파괴를 자랑하는 정복군들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작정하고 부쉈다하면 그 민족을 씨도 안 남기고 말살시키는 것은 기본이었고, 어떤 경우에는 모든 건물을 다 부수고 난 후에 사람들을 끌어내서 다 죽이고, 먼 타지로 이주시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어디선가 물을 끌어다가 남겨진 도시를 잠기게 했고 물이 빠진 뒤에는 정말 말 그대로 땅만 남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역사가 말해주듯 잔인무도하기 그지없는 앗시리아. 이스라엘과는 철천지 원수 국가인 앗시리아의 수도가 바로 니느웨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렀다고 말이지요. 그러자 요나는 말없이 조용히 주님의 낯을 피하여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이스라엘의 남서쪽에 있는 지중해의 항구도시 욥바로 내려갑니다.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한 것이지요. 니느웨의 지리적 위치는 지금으로 말하면 이라크 북부지역 정도 되구요,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위치해서 바닷가와는 정반대의 육지 한복판에 있는 도시입니다. 욥바로 내려가니 다행히 스페인으로 떠나는 배가 있었고, 요나는 뱃삯을 내고 사람들과 함께 그 배를 탑니다. ‘육지로 가라고 하시니 저는 바다로 가겠습니다’라고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정반대로 하는 모습이 완전히 청개구리 요나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요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명령대로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고 외치면, 혹시라도 그들이 회개하여 심판을 모면하게 될까봐 가서 말하기 싫었겠죠. 자기 민족을 그렇게 괴롭히던 원수 국가인 앗시리아인데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심판받고 멸망당하기를 빌면 빌었지 그들의 잘못을 알려주라니... 오늘 읽은 본문말씀 4장 2절에 나오듯이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심판을 거두실까봐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원수인 앗시리아가 회개할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는 자기 하나님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살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이미 자기 안에 형성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불의한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거두실 수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스페인을 향해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히게 되는... 세계명작동화에나 나올 법한 아주 아주 동화같은 경험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인지 이 요나서에 대한 해석방법은 다양합니다. 비유적인 해석방법도 있고 역사적인 해석방법도 있습니다. 요나서를 역사적 예언과 교훈으로 보는 구약학자 폰라드의 전통적인 해석도 있구요, 풍자 혹은 패러디, 디아스포라 소설로 보는 등의 다양한 해석들이 성서학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요나서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요나가 직접 체험하고 쓴 것인지 아니면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나오는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고 하는 8세기 중반의 역사적 인물에 관한 기억에 의존하여 후대의 어떤 저자가 쓴 비유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접어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요나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주시려고 하는 당신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다시 요나서로 돌아가겠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요나는 태풍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태풍의 원인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침을 뚝 떼고 배 밑창으로 내려가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태풍을 만난 위기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선원들의 행동과 반응들이 주목할 만 합니다. 그들은 요나에게 어서 빨리 일어나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라고 말하면서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요나보다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선원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자기보다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은 이 이방인 선원들에게 타박을 당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과 당신의 뜻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요나가, 하나님의 길을 모르는 무식쟁이와 죄인들이라고 취급하던 이방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급기야 선원들은 재앙의 상황이 닥친 이유를 알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게 되고, 모든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가 믿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잘못이 발각되어버린 요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희생정신(?)을 보이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도 선원들의 반응과 행동은 주목할 만 합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주저없이 요나를 바다에 버려야 마땅할텐데, 그들은 요나의 생명을 선뜻 희생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든 노를 저어 육지로 돌아가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파도가 점점 더 거세지자 자신들의 한계를 느끼고 요나의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인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게 됩니다. 그러자 폭풍이 일던 바다는 잔잔해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당신을 섬기겠노라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요나는 엉겁결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선교의 도구가 된 것이지요.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이 싫다고 도망가던 중에, 심지어 자신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이방 선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떻게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성경 만화책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요나 이야기에서는 마치 각인이라도 된 듯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촛불을 켜고 하나님께 두손 모아 기도드리고 있는 요나의 모습입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해 두신 큰 물고기에게 삼켜지게 되고 사흘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를 말이죠. 시편을 많이 인용한 듯 보이는 이러한 요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그 기도가 이중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장 2절부터 7절까지 요나의 기도 부분을 제가 읽겠습니다. 어떤 이중적인 움직임이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내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 가운데서 살려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3 주님께서 나를 바다 한가운데, 깊음 속으로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주님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습니다.
4 내가 주님께 아뢰기를 ‘주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어도,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하였습니다.
5 물이 나를 두르기를 영혼까지 하였으며,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휘감았습니다.
6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7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렀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한 움직임은 바다 깊은 데까지, 땅 속까지, 스올(즉, 죽은 자들의 거처)의 바닥까지‘내려가는’움직임입니다. 또 다른 한 움직임은 기도를 통하여‘올라가는’움직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다시 살려내어 굳은 땅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내려가고 올라가는 이 움직임은 죽고 부활하는 체험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그 곳에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이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한 이 체험은 요나로 하여금 죽음을 체험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당신께 간구하는 모든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2장 9절에서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다시 뭍으로 나온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고 외치고 다닙니다.

이때 요나의 진정한 심정은 어땠을까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길 바랬을까요? 물론, 요나를 하나님께서 살려주셨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에, 그 명령에 결국은 순종하여 예언을 선포하긴 한다지만, 자신의 민족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자들이 구원받기를 요나는 바랬을까요?

워낙 큰 성읍인지라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걸린다는 니느웨를 요나는 단지 하룻길만을 걸으면서 추측하건데 건성으로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까지 선포하며,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회개를 하게 됩니다. 니느웨의 왕은 모든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나쁜길에서 돌이키고 휘두르던 폭력을 거둘 것을 명령합니다. 그렇게 하면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도 모른다고 두려움 속에 기대를 하며 멸망을 면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뉘우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시고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게 됩니다. 요나가 처음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지요.

요나는 회개를 직접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만 선포하였지요. 그렇지만 뜻밖에도 니느웨 백성들은 자기들이 멸망하지 않을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왕까지도 금식에 동참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니느웨 왕이 그 금식에 적극 참여한 사실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왕이 용상에서 내려와 속죄한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하여 국가 내에서 행사하던 가장 높은 권력까지를 모두 포기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니느웨 왕의 태도는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지도자는 자기네 백성의 역사와 운명에 대한 최종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치지도자들이 그러한 회개의 과정을 다져주지 않으면, 백성은 회개의 과정을 이어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니느웨 왕은 스스로 굵은 베옷을 입고 용상에서 내려와 잿더미에 앉아서 회개하며 뉘우침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요나의 예언 선포를 듣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높으신 분이고, 두려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나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을 면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왕은 3장 9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뉘우치고 회개하며 용서를 빌고 구원을 희망하고 있을 뿐 그것을 확신하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하나님의 자비를 겸손히 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교만과 자부심을 던져 버린 것이지요. 자신들이 옳다고 믿던 것들, 그리고 자신들이 좋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 4장을 봅니다. 4장 1절에서 요나의 본심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민족을 억압하고 괴롭혔던 자들이 하나님의 노여움과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요나는 2절에서 하나님께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하며 불만을 쏟아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익히 알기에 자기 민족의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해 주실 줄 알았다면서 성질을 부립니다. 성질도 아주 대차게 부립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며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대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요나가 마치 하나님의 모든 의지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면서 화를 내는 모습은 정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다고 믿는 어리석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서 빠져나와 동쪽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머무릅니다. 니느웨 성읍이 어찌되는 가를 볼 속셈으로 말이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통해 요나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박 넝쿨이 자라 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가, 단 하루만에 벌레를 통해 박 넝쿨을 말라 죽게 하시고 요나에게 뜨거운 동풍까지 불게 하셔서 요나로 하여금 괴로움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또 하나님께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며 원망을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요나에게 물어보십니다. 요나는 당돌하게 대답합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와같은 교훈을 말씀해 주심으로 요나서는 끝을 맺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도망갔던 처음부터, 니느웨에 가서 예언을 선포하고 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보다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즉, 인과응보의 결말을 더욱 원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하나님을 원망하며 깊이 실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좌우조차 가릴 줄 모르는 분별력 없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도록 하는데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만과 잘못된 행실을 버리고 겸손히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인과응보의 결말만이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온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뜻만이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요나서의 말씀을 통해 깨닫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변함없이 그리고 영원히 합당한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의지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좌우조차 제대로 가릴 줄 모르는 분별력 없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소명으로 받아 세상에 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가서 나의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변화를 시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서 회개하도록 만들라고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귀 있는 사람은 들을 것이고, 깨닫는 사람은 회개할 것이고, 잘못을 뉘우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어떤 방법으로든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역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영원히 합당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당신의 뜻을 깨달아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회개하게 하소서. 그리고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생각과 의지가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당신의 뜻만이 영원히 합당하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인정하오니, 저희의 삶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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