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일곱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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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보복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창세기 9:1-7/ 히브리서 4:12-13/ 마가복음서 10:17-22
설교자 채수일목사
예배일 2018-10-14
전주 주님을 찬양하나이다(G. Corrette)
찬양1부 자비하신 하나님(G. R. Youse)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권정원 집사
찬양2부 주여 이끄소서(J. R. Gillette)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크신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돌리나이다(W. H. Doane)
후주2부 크신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돌리나이다(W. H. Doane)
성경본문 창세기 9: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먹거리로 준 것 같이, 내가 이것들도 다 너희에게 준다.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서 10:17-22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1. 기록으로 남겨진 많은 창조 설화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창조 이야기는 신(神)들의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전 1100년 경, 아카드어로 기록된 바빌론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저 높은 곳에서 신들이 있을 때라는 뜻)는 티아마트와의 격렬한 싸움 끝에 승리한 마르둑(Marduk)이 티아마트의 몸을 양분하여 그 반쪽으로 하늘을, 다른 반쪽으로 땅을 만들어 혼돈에서 질서를 만든 이야기입니다. 마르둑은 킹구를 죽여 그의 피를 모아 뼈를 만들어 ‘룰루’(Lullu, 룰루는 수메르에서 차용된 아카드어로 그 의미는 원시인입니다)를 만들고, 그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신들의 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바빌론의 창조 서사시는 한편으로는 우주와 인간의 창조 이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빌론을 자신의 거룩한 도시로 세우고, 도시의 사원을 인류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는 장소로 세운 것에 강조점을 두면서, 함무라비 대왕의 우월성을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상형문자로 기록된 이집트의 창조 설화인 ‘멤피스’(Memphis) 신학에 따르면, 이집트의 신 ‘프타’(Ptha)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혀로 말함으로써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나일 강의 범람이 이집트 땅에 풍요와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은 물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비옥한 이집트의 자연환경은 우주가 안정과 균형으로 구성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신들의 전쟁으로 창조가 시작된 것으로 보는 바빌론 창조설화와 달리 고대 이집트인들은 매우 낙관적인 창조 이야기를 가지게 된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집트의 ‘프타’ 신이 말로 창조하고, 창조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성경의 창세기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 비슷한 창조 설화들이 널리 퍼져 있었고, 바빌론과 이집트의 창조 이야기로부터 성경의 창조 이야기도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바빌론이나 이집트의 창조 서사시와 다른 점도 분명합니다.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는 대부분 왕들이나 제사장 등 특권층 계급의 권력을 신화적으로 정당화 하고, 현상유지를 위해 만들어졌다면,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는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유일신 신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어진 권위도 신적인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데 초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우주와 인간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던 창조는 인간의 죄, 곧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으로 추동된 불순종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그 후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역사는 가인의 형제살인으로 이어지는 죄악의 역사였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이었습니다.’(창 6,5). ‘세상은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습니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창 6,11-13).

그래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시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창 6,5-7), 말씀하시고, 지구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2. 사람의 죄 때문에, 다른 피조물까지도 심판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던 노아와 그의 후손들은 살려두어 두 번째 창조의 계약 파트너로 삼으셨습니다.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후손들, 그리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두 번째 계약을 맺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피에는 생명이 있으니,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 사람에게도 보복하신다는 것이지요.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든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그런데 동물은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창 9,4)고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록 인간이 생존하기 위하여 동물을 죽이더라도 생명은 본래 하나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생명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물을 인간이 침해하고 있음을 언제나 알아야 하고, 그 표시로서 피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의를 위해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칠 때는 물론이고, 세속적인 도살에서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되었고, 피는 물처럼 부어져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피는 먹어서는 안 됩니다. 피는 생명이고,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피는 먹지 못합니다. 물처럼 땅에 쏟아 버려야 합니다.’(신명기 12,23-24; 신명기 15,23).

피는 곧 생명과 동일시되었고,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라는 고대 이스라엘의 생각이 반영된 상징행위인 것이지요. 특히 인간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수립은 단언적으로, 무조건적으로 표명됩니다.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침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인권사상이나, 인도주의, 생명의 외경에 입각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인은 사형으로 보복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창 9,6).

살인의 경우, 배상금으로 변상되지 않고, 오직 죽음으로만 보상할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소유이고, 경제적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창 9,5).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홍수 심판 이후, 다시 말해 두 번째 창조 때에 하나님이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와 맺은 계약입니다.


3. ‘반드시 보복하시는 하나님’, 이 분이 성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도처에서 ‘적들에게 진노하시며, 원수들에게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사야서 59,18)’만이 아니라,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창 6,6), ‘탄식하시는 하나님’(창 6,7), ‘심판하시는 하나님’(창 18,25 등 251개)을 만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는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요엘서 2,18),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주님,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놀라시는 하나님’(이사야서 59,15-16)을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닌데, 어떻게 인간처럼 슬퍼하고 기뻐하며, 놀라고 진노하며 보복하신단 말일까요? 신에 대한 이런 모든 인격적 표상은 유치하고 유아적이며, 포이어바흐(Ludwig von Feuerbach, 1804-1872)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신을 창조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종교적 심성 그 자체도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맑스(Karl Marx, 1818-1883)의 말은 정당하지 않은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말한 것처럼 종교는 약자들의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노예의 도덕이 아닌가!

타당한 비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자이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인격적으로 표상하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자들이 찾은 길의 하나가 신비주의입니다. 종교적 제의나 성직자, 인간적 언어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신을 체험하고, 인식하는 길이지요. 또 다른 길은 범재신론입니다. 신은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지요. 신을 만물과 동일시하는 범신론의 위험과 인격적으로 표현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신을 ‘에네르기아’, 생명력, 혹은 영으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어떤 길이든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길은 자칫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뿐입니다. 인간 앞에 서계신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실 때에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만큼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모세와 사람이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이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고 하지만(출 33,11),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등을 보았을 뿐입니다(출 33,23).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출 33,20).
우리가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실 때에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실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절대자이고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상대화하고 대상화하실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대화와 만남은 믿음의 행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구별되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춰 피조물과 자신을 결속하실 때,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은혜이고, 우리의 언어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복을 기도할 수 있을까요? 탄식시를 쓴 시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내고 고통을 준 적대자들과 우리 생명을 파괴하는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려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시편 3,7). 악인들이 하는 일은 오히려 언제나 잘되고, 주님의 심판은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아 코웃음을 치는 그들을 벌하여 달라고 빌 수 있을까요?(시편 10,5-12).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할 수 없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절규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억울하게 고통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선 인간, 탄식시인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로마서 12,19)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지요.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비겁한 사람이 되거나, 화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로마서 12,20)고 말한 것일까요?

그것은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기 32,35). 원수 갚기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은 보복할 힘이 없는 약자의 비겁한 유예가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는 숨어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언제 보복하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원수 갚기를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말씀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 약속에 대한 ‘올 인’(All in)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양날 칼보다 더 날카로워,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심판하신다고 합니다(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2). 인간 앞에 선 하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인간 앞에 선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지만,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그 말씀을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 신실하게 계명을 지킨 부자 청년을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신 예수님은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 때, 놀란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을 눈여겨보신 주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 어찌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만 그렇겠습니까!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재산보다 하늘의 보화를 더 중하게 여기는 것, 믿음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보화가 무엇인지 세상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줘도 될 만큼 값있는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본적도 없습니다. 하늘의 보화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원수 갚기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도 믿음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믿음 없이,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믿음 없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하고, 순종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이유, 원수 갚기를 오직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다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화를 품고 있으면, 원수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탈 수 있다는 치유상담의 권유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미래의 심판으로 유예하는 자기기만도 아닙니다.

‘어떤 양날 칼보다 더 날카로워,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심판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히 4,12-13)에 대한 믿음이 ‘환난 가운데서 인내력을 낳게 하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게 합니다.’(롬 5,3-4).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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