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넷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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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성경구절 미가서 5:1-4/ 히브리서 10:5-10/ 누가복음서 1:39-45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8-12-23
전주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뻐하라(D. Buxtehude)
찬양1부 주께 영광(G. F. Händel)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오 주여 어서 오소서(N. White)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E. S. Barns)
후주2부 참 반가운 신도여(J. F. Wade)
성경본문 미가서 5:1-4
군대의 도성아, 군대를 모아라! 우리가 포위되었다! 침략군들이 몽둥이로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뺨을 칠 것이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당신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의 동포,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10:5-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서 1:39-45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1.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내러티브를 전승하고 있는 복음서는 마태와 누가입니다. 그런데 마태와 달리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결합시켰습니다. 누가가 어디에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 자료를 전승받았는지, 아니면 누가 자신이 작성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고.... 누가 자신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다’(눅 1,1-2)는 말에 비추어,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누가가 속했던 안디옥 지역의 이방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덧붙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첫째 이유는 아마도 두 아기의 탄생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척이었고, 엘리사벳은 사가랴와 결혼했으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고,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했으나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두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합니다(눅 1,37).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들에 대한 자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6,4), 이삭의 아내 리브가(창 25,21), 야곱의 아내 라헬(창 30,1), 삼손의 어머니(삿 13,2),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이야기(삼상 1-2장) 등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이야기와 같은 맥락 안에 있습니다. 엘리사벳과 사라 사이의 특별한 유사성은 그 두 여인이 불임뿐만 아니라 출산할 수 있는 정상적인 나이를 지났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부가 자식이 없다는 것은 불운이었고, 불명예 혹은 죄에 대한 형벌로 이해되었기 때문에(창 16,4, 11; 29,32; 30,1; 레 20,20-21; 삼상 1,5-6; 삼하 6,23), 엘리사벳에게 수태고지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도 그랬을까요?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소식이었습니다. 약혼은 남자가 여자와 이혼할 때만 파기될 수 있었고, 여자가 남자의 결혼관계의 권리를 위반했을 때, 그것은 간음으로 간주되었고, 곧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약혼했으나 남자를 몰랐던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것은 실로 두렵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마리아의 마음이 과연 어떤 상태에 있었을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마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도 임신할 수 없는 나이에 임신하였다는 것을 알리면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눅 1,3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정말 그럴까요? 이 말을 믿지 않는, 아니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나 불신 때문이 아니라, 자기 현실의 불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사라 자신이 이미 나이가 들어 임신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도 늙은 사람이고 아내도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천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천사가 사가랴의 입을 막아 말을 못하게 한 것도 불신앙에 대한 처벌이기 보다는, 어쩌면 하나님의 비밀이 드러날 때까지 그 비밀을 유지하려는 뜻이었을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어땠을까요? 마리아는 ‘성령이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를 감싸 주시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도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녀를 두렵게 한 것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누구의 아기인지도 모르는 아기를 임신한 결과가 가져올 확실한 위험이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은 언제나 우리 현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변화가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절망,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절망적인 현실, 두려운 현실 때문에 믿음을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절망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루어질 줄 믿었고’(눅 1,45), 마리아는 두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라고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만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상호적이지 결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결합된 두 번째 이유는 누가가 초대 교회 안에서 제기되었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답하려는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촉구와 세례운동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비슷했고,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세례자 요한인지 예수님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눅 3,15). 누가는 이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주님은 아니며, 다만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로 제시한 것이지요(눅 1,15-17). 후에 세례자 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눅 3,16)라고 말한 것도 이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세례자 요한을 참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 11,11)고 극찬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한 말씀을 거기에 덧붙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 11,11).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폄훼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도 작지 않다는 것이지요. 아기를 낳지 못해 차별받고 부끄러워해야 했던 엘리사벳도, 누구의 아기인지도 모르는 아기를 임신하여 자칫 돌에 맞아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마리아도,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위해 선택한 사람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비록 작고 하찮을지라도,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위대하기 때문이고, 그 일을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요한보다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 그 일이 비록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두렵고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엘리사벳과 그렇게 믿은 마리아는 행복한 사람의 반열에 들게 되었습니다(눅 1,45).

2. 하나님은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작아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 보잘 것 없고 작은 사람들을 통해서 크고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은 예언자 미가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예언자 미가는 유다의 왕 요담(기원전 747-742)과 아하스(기원전 742-725)와 히스기야(기원전 725-697)가 대를 이어가면서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 곧 앗시리아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시기에 활동했습니다(미 1,1).

강대국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 동안 포위 공격, 마침내 주전 721년 함락시킨 이래 이스라엘과 봉신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주전 713년, 앗시리아 왕, 사르곤이 죽자, 반 앗시리아 폭동에 가담했으나, 결과는 비참한 패배였습니다. 유다의 성읍들은 약탈당했고, 블레셋 도시의 왕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항거한 대가로 과중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다시 봉신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는 친 앗시리아파와 반 앗시리아파로 갈라져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내며,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가마솥에 넣고 삶아 먹는다.’고 미가는 절규합니다(미 3,1-3).

 

예언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속이고, 입에 먹을 것을 물려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했습니다(미 3,5).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히면서도, 하나같이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미 3,11). 재앙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말입니다. 도성이 포위되고, 침략군들이 몽둥이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의 뺨을 칠 날이 가까이 왔는데도(미 5,1), 그들은 거짓 평화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자 미가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유다 구릉 지대의 한 작은 촌락인 모레셋 출신이라는 것은 그가 억압받던 소농이나 가축 사육자들의 무리에 속했던, 이름 없는 예언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합니다.

 

미가는 교육받은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밝히듯이 ‘나에게는, 주님께서 주님의 영과 능력으로 채워 주시고, 정의감과 함께, 야곱에게 그의 죄를 꾸짖고 이스라엘에게 그의 범죄를 꾸짖을 용기를 주셨다’(미 3,8)는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 없이 권세가들이나 부호들에게 맞섰습니다. 이권을 탐하여 의무와 본분을 망각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을 질타했습니다. 이방 제의관습에로 복귀하는 백성에게 분노를 참지 않았습니다(미 5,12-15).

 

그런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새로운 통치자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합니다. 에브라다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입니다. 유다 지파의 군대에서도 1,000명 이상을 넘지 못하는 부족이니 참으로 작은 족속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족속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사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숨겨진 계획입니다. 누구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부족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적적 권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던 시절, 과연 누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에서 이름 없는 목수의 약혼녀의 몸을 빌려 태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보다 앞서 와서 주님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할 세례자 요한이 아비야조에 배속된 나이 많은 평범한 제사장 사가랴와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을 통하여 오리라고 누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은 오직 믿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은 누구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보는 사람에게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의 구원사가 숨겨져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관습과 제도에서 오는 차별로 고통 받은 엘리사벳, 관습과 제도를 넘어섰기에 목숨이 위협받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리아는 오늘 어디에 있을까요?

 

예언자 미가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백성을 먹이는 것과 그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안전하게 사는 것, 그것이 ‘평화’입니다(미 5,4-5). 평화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가스보일러 부실시공과 부실점검으로 강릉 팬션에서 참변을 당한 고3학생들, 철거를 3일 앞둔 천호동 이른바 텍사스 성매매 지역, 재개발구역에서 며칠이라도 더 돈을 벌겠다고 남았다가 화재로 목숨을 잃은 여인, 400일 넘게 높이 76미터의 굴뚝에서 고공농성중인 파인텍 노동자들, 40만 명이 넘는 청년 실업자들이 있는 동안(2018년 7월 기준), 우리는 결코 평화로운 나라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과 이념, 성정체성이 다르다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하고 차별하는 편견과 힘겹게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를 우리는 결코 평화로운 나라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평화, 그것은 거짓 평화, 위험한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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