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다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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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육신에 속한 생각과 성령에 속한 생각
성경구절 에스겔서 37:1-14/ 로마서 8:6-11/ 요한복음서 11:38-44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3-29
전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F. Couperin)
찬양1부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M. W. Moody) - 특송: 김준홍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주가 죽으신 십자가(L. Mason)
후주2부
성경본문 에스겔서 37:1-14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무슨 소리가 났다. 보니, 그것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로마서 8:6-11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1:38-44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어귀는 돌로 막아 놓았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 인류의 역사에서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특히 서양 중세에 있었던 흑사병은 유럽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놀라운 속도의 확산으로 세계경제시스템에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전례가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세계적 대유행은 21세기의 인류에게 재앙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교회는 감염병의 대유행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과학혁명 이전의 옛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유발하는 재앙적인 감염병을 하늘이 내리는 징벌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감염병에 대한 지식과 의학의 놀라운 발전으로 이제는 더 이상 감염병을 신()의 심판으로 보는 사람은 - 소위 이단이나, 광신적 종말론자들이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보여준 다른 태도는 감염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의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16세기 독일의 개혁가였던 마틴 루터는 목회자는 치명적인 감염 병에 맞서 죽음을 두려워 말고 병든 자를 위로하며, 성례를 집행해야 하고, 시장과 법관, 의사와 경찰은 자리를 지켜 도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감염병을 신이 내린 심판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싸워 이겨야 할 병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그것은 자신을 돕는 길이기도 하지만, 같은 위험 앞에 노출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1527년 루터가 요한 헤쓰에게 보낸 편지, ‘죽음으로부터 도피해야 하는가?’는 예배중단 권유를 종교탄압이라고 오해 또는 왜곡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것이 큽니다:

 

원수가 우리에게 독과 죽음의 병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막아주시기를 부탁하고자 합니다. 그 다음에 나는 훈증 소독도 하고, 공기가 정화되도록 돕고, 약을 주고, 약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장소들과 사람들을 피하고자 합니다. 나 스스로를 몰락시키고, 그 외에도 내가 정말로 다른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감염시키고, 이렇게 나의 소홀한 태도를 통하여 죽음의 원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도 책임이 없고, 다른 이들의 죽음에도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그 어떤 장소도 사람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그에게 가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돕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어리석지도 않고, 뻔뻔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는 올바르고 경건한 믿음입니다.’(번역: 한정애 교수).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교회당 안에서의 예배와 집회를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종교탄압’, ‘종교자유의 침해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牽強附會)이자, 개혁가 마틴 루터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염병 사태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온갖 가짜뉴스를 생산해내고, 집단지성으로 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집단광기로 위기를 더 극대화시키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일이지요. 이것이 한국교회 수준이라면, 교회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신천지나 그런 교회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안 믿는 사람들은 싸잡아 기독교를 비웃을 터이니, 차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 전염병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주전 597,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략했을 때, 유다 백성 삼분의 일은 전염병에 걸려 죽거나 굶어죽었습니다(5,12).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전 안의 모든 보물들은 탈취 당했습니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니, 왕비들과 고관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 제사장 부시의 아들, 에스겔(Ezekiel: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강하게 붙잡으신다는 뜻)을 부르셨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정착지, 델아빕(Tel-abib), 그발(Kebar) 강가에서 제사장 에스겔은 조국의 파멸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유배의 충격으로 괴롭고 분통이 터지는 심정에 잠겨’(3,14),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습니다’(3,15).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의 영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셨고, 그는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벙어리가 됩니다(3,26). 말을 못하게 된 에스겔은 온 몸으로 단지 상징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했습니다. 밧줄로 온 몸을 묶고 누워 390일 동안 쇠똥에 구운 빵을 먹음으로써, 39년 동안 유다 백성이 겪게 될 바빌로니아 유배생활을 예언해야 했습니다. 또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 삼분의 일씩 태우고, 칼로 내려치고, 바람에 흩어지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징 행위는 유다 백성 삼분의 일이 전염병에 걸려 죽거나 굶어죽을 것을, 또 삼분의 일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을, 나머지 삼분의 일은 쫓겨나가게 될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4명의 예언자들(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과 함께) 가운데 한 사람인 에스겔도 비운의 예언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주전 593년부터 571년까지 활동하면서 자기 백성에게 행복과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 재앙과 멸망을 선포해야 하는 고통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멸망해 가는데, 사람들이 예언자에게 묵시를 구해도 얻지 못하고, 제사장들은 가르쳐 줄 율법이 없고, 장로들에게는 지혜가 사라졌습니다. 왕은 통곡하고, 지도자들은 절망에 빠지고, 백성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7,26-27), 거짓 예언자들은 폐허 더미에 있는 여우처럼(13,4), 헛된 환상과 속이는 점괘를 보면서(13,7), 무엇 하나 잘 되는 것이 없는데도 잘 되어 간다고 백성을 속이고(13,10), 전혀 평화가 없는데도 예루살렘에 대하여 평화의 환상을 보았다며 귀환을 약속합니다(13,16).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과 달리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하고(15,6-7),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를 통렬하게 비난합니다(6,1-6).

 

바로 이 때, 에스겔은 두 가지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첫 번째 환상은 골짜기에 가득 찬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역사의 죽음에서부터 부활하는 것이었고(37,1-14), 두 번째 환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메시아적 왕의 통치하에 통일되는 것이었습니다(37,15-28). 하나님은 살해당한 사람들의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나게 하시고(37,9),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이끌어내심으로써(3712), 희망이 사라졌으니 망했다고 절망해 있는(37,11) 유다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신 것이지요.

 

3. 에스겔에게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죽었다가 집단적으로 부활한 사건을 보았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한 사람, 무덤에서 이끌어냄을 받은 인물, 나사로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11,45)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이 사건 직전에 있었던 이적, 곧 나면서부터 보지 못한 사람의 치유사건에 이어,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이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할 수 없는 메시아가 행한 이적의 절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목하지 않고, 이 사건 직후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이들 회당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표징에 전혀 감동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 무슨 표징인지도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에게 그런 표징은 오히려 그들의 기존의 삶에 대한 끔찍한 위협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표징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 메시아가 나타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이니, 한 사람이 죽어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은 것이 유익하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주장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11,48-50).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11,53). 죽은 사람을 살려낸 이적이 누군가에게는 믿음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두려움과 살의를 일으킨 것이지요.

 

그렇다면 유대 회당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표징을 믿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이적 중의 이적, 죽은 지 삼일이나 지나 부패한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왜 믿을 수 없었을까요?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몰라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도 같은 통찰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세상으로 다시 보내 자기 형제들에게 경고하게 해달라고 지옥에 있는 부자가 부탁합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16,30-31).

 

생명에 이르는 길, 이미 예언자의 말과 율법으로 세상에 있는데, 그 길을 찾지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이적을 보았다고 해도, 다시 말해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본다고 해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4. 그렇습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무엇인지, 왜 일어났는지, 그 결과가 어떤 변화를 강요할 것인지, 우리가 모르는바 아닙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 재난은 분명히 교회는 물론, 세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것처럼, 경제는 물론 정치, 그리고 문화도 바꿀 것입니다. 다만 이 변화가 더 크고 깊은 위기로 갈지, 아니면 인류를 새로운 깨달음과 공생의 기회로 이끌 지는 전적으로 인류의 학습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생성과 확산과정, 변종의 조건 등이 아직 완전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숙주로 하여 끊임없이 진화, 변종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포유류 야생동물을 섭취한데서 왔는지, 세균 연구소 관리를 잘 못해서 그랬는지 아직 모르지만, 이번 바이러스 재난은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우리 욕망을 채우려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하고, 수탈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후재앙과 마찬가지로 이번 바이러스 사태도 우리 인간 자신이 자초한 인재(人災)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제 문명사적 거리두기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잠시 멈추어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추구해온 지구적 규모의 약탈적 자본주의의 발전 패러다임이 지속가능한 것인지, 숙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 19’사태로부터 무엇인가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같은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인류에게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세계에는 국경이 있지만, 바이러스에게는 국경이 없습니다. 바이러스는 사람의 나이도, 성도, 계급도, 인종도 가리지 않습니다. 인류는 이제 모두 함께 죽든지 아니면 함께 살든지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와 거기에서 파생된 경제위기가 글로벌 위기인 것처럼, 인류의 대응도 글로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인 것이지요. 이제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분열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연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위기는 장기화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욱 큰 재앙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글로벌 연대를 택한다면,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승리가 될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모든 전염병을 상대로 한 승리가 될 것이다고 말한 유발 하라리도 같은 생각입니다.

 

5. 빌 게이츠는 코로나 바이러스 19’를 거대한 재앙이 아니라, 위대한 교정자로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잊고 살아온 중요한 교훈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것이 주어졌고, 그것들을 배울지 말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이 시간이 종말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며, 이 시간이 성찰과 이해를 통하여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배울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회로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기이자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주는 일,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일으키는 일,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일,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는 일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적과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달려가는 의료진들, 자기는 살만큼 살았으니 젊은이에게 산소 호흡기를 주라고 하고 세상을 떠난 할머니, 자기 몫의 마스크를 사지 않고 더 어려운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시민, 헌혈하고 성금을 모아 보내고, 해외에서 귀국하는 국민에게 기꺼이 자가격리 공간을 제공한 시민들, 시도 경계를 넘어 환자들을 받아 치료하는 모습은, 영세 상인들을 돕기 위해 착한 소비에 나선 시민들, 이름 없는 이들이 모두 진정한 영웅입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사태를 가장 모범적으로 대응한 나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방역시스템, 검진키트의 수출은 물론 놀라운 시민정신도 수출되어 세계의 존경받는 국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민들의 헌신과 연대야말로 과연 새로운 세상은 가능하다는 표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표징들을 보고서도 감동은커녕, 위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언론들과 정치인들, 집단 지성으로 재난을 극복하지 않고, 집단 광기를 부추기는 일부 기독교집단들, 위기를 돈벌이의 기회로 생각하고 사재기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코로나 시대의 표징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생각과 성령에 속한 생각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이고,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는 것입니다(8,6).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재앙의 시대적 표징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재앙은 은혜의 표징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리가 거리를 두고 사람과 사물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던 우리의 다른 모습,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멈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오직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우리가 걸어온 뒤를 돌아보게 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개인의 생명이 우주적 온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문명사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주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지금까지 인류를 분리해온 모든 보이는 장벽,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계급적, 남녀노소의 장벽을 한꺼번에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인류는 힘과 지혜를 모아, 사랑과 연대로 함께 살든지, 아니면 함께 죽든지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으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19’와 함께 온 변화의 표징을 깨닫고, 우리가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될지, 아니면 죽음을 가져오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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